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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와인 리스트 읽는 법, 이름 속에 숨어있는 풍미

by 콩코드


어떤 레스토랑에 들어서, 잘 정돈된 테이블에 앉습니다. 하얀 냅킨, 은빛 커틀러리, 잔이 가지런히 놓인 테이블 위에, 마침내 하나의 세계가 펼쳐지죠. 메뉴판을 펼치자, ‘메를로, 피노 누아, 바롤로, 리슬링, 말벡…’ 알 듯 모를 듯, 외국어 같은 이름들이 한가득.


당황하셨다면, 전혀 이상할 게 없어요. 이건 단순한 술의 리스트가 아니라 지역, 품종, 시간, 사람들의 기호, 역사, 스타일이 함께 뒤엉켜 있는 ‘작은 와인 지도’거든요.


와인 리스트를 읽는 건 마치 한 도시의 지도를 펴고 “오늘은 어디를 걸어볼까?” 고민하는 것과 비슷해요. 우리는 잔을 고르기 전, 이미 마음속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브르고뉴는 섬세하고 투명한 맛의 도시, 보르도는 깊고 구조적인 거리로 이루어졌고, 토스카나는 풍성한 햇살과 타닌의 언덕을 품은 들판이죠. 모스엘 계곡은 하얀 복숭아 향이 스치는 강가의 산책로 같고, 멘도사는 안데스 바람 속을 달리는 짙은 자주색의 길이에요.


이름 속에는 정말 많은 정보가 숨어 있어요. 몇 가지, 같이 살펴볼까요?


1. 포도 품종을 읽는 눈

와인의 ‘이름’은 때로 포도 품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건 마치 요리의 주재료를 아는 것과 같아요. 기본적인 풍미의 틀이 그 안에 담겨 있거든요.


피노 누아 (Pinot Noir): 붉은 과일, 장미향, 섬세한 산미. 마치 비 오는 오후의 짧은 시처럼 부드럽고 감성적입니다.

까베르네 소비뇽 (Cabernet Sauvignon): 블랙베리, 오크, 탄탄한 구조. 묵직하고 진중한 대화처럼 다가오는 맛이죠.

샤르도네 (Chardonnay): 부드럽고 버터리하거나, 상큼하고 미네랄리한. 때론 구운 사과 같고, 때론 바다 바람 같은 와인.


포도 품종만 알아도, 이미 반은 선택이 끝난 셈이죠. 음식과 조화시킬지, 오늘의 기분과 어울릴지—작은 단서들이 힌트를 줍니다.


2. 지역명에 숨은 비밀

유럽 와인은 대부분 ‘지역 이름’이 곧 와인의 이름입니다. 이건 단순한 지리 정보가 아니라, 그 땅의 햇살, 공기, 전통, 그리고 시간의 축적이기도 해요.


샹파뉴 (Champagne): 프랑스 샹파뉴 지역에서 만든 스파클링 와인. 한 모금마다 기포가 입 안에서 춤추는 축제입니다.

끼안티 (Chianti):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대표 와인. 감미로운 타닌과 체리 향이 토스카나 언덕을 닮았죠.

리오하 (Rioja): 스페인 북부의 우아한 레드 와인. 숙성된 오크의 향, 부드러운 끝맛—시간을 천천히 마시는 느낌입니다.


같은 품종도 어디서 자랐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옷을 입게 됩니다. 지역 이름을 아는 건, 그 땅의 이야기를 한 잔에 담는 일입니다.


3. 빈티지(수확 연도)의 감각

“이 와인은 2016년산입니다.”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그 해의 햇살, 비의 양, 바람, 그리고 농부의 손길이 담긴 연도입니다.


어떤 해에는 포도가 아주 익어 풍성한 와인이 되고, 어떤 해에는 날씨가 까다로워 더 섬세하고 묘한 맛이 피어나죠. 이건 자연과 함께 만든 ‘한 해의 맛’이자 시간이 병 속에 머무는 방식입니다.


4. 스타일을 가늠하는 단서들

와인의 라벨에는 작지만 강력한 단서들이 숨어 있어요. 이 단어들을 이해하면, 맛을 상상할 수 있게 되죠.


Reserve / Gran Reserva: 더 오래 숙성시켜 풍미가 깊고 부드러운 와인

Brut / Demi-Sec / Dolce: 스파클링 와인의 단맛 정도

Estate Bottled: 포도 재배부터 병입까지 한 곳에서—정성과 자부심이 깃든 와인


이런 작은 단어들 덕분에 잔 속의 세계가 훨씬 더 또렷해집니다.


와인 리스트를 읽는다는 건 잔을 고르기 전에 미리 한 번 여행을 떠나는 일입니다. “오늘은 어떤 감정을 마셔볼까?” “이 음식에는 어떤 풍미가 어울릴까?” 그 질문들이 쌓여 한 잔의 와인이 되는 것이죠.


이제, 와인 리스트가 두렵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익숙한 이름 옆에, 낯선 이름도 용기 있게 골라볼 수 있기를. 왜냐하면, 가끔은 낯선 와인이 당신을 가장 놀랍게 흔들어 놓기도 하니까요.


다음 장에서는—

*‘와인을 사랑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려 해요. 세기의 화가와 소설가, 배우와 철학자들까지. 그들이 와인에 빠졌던 순간들, 잔 아래 숨어 있던 생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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