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석을 멈추는 용기, 감각으로 살아내는 예술: 『해석에 반대한다』를 다시 읽는다
- “예술은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되어야 한다.”
우리는 왜 모든 것을 ‘해석’하려 드는가
오늘날 우리는 매 순간 해석한다. 영화는 분석되고, 전시회는 해설로 소비된다. SNS 피드 속 사진 한 장도 ‘의도’를 묻고, 유튜브 속 한마디도 ‘맥락’을 따져 묻는다. 현대인은 마치 의미 탐지기처럼 세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수전 손택은 이 반복적인 의미 추구의 행위를 일침한다. 그녀는 1964년의 날카로운 언어로 선언했다.
“해석은 예술의 적이다.”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손택은 감상자들이 작품을 향해 ‘이것은 이런 뜻이다’라고 덧씌우는 행위를 “감각의 암살”이라고 부른다. 의미에 집⁰착하는 태도는 예술이 지닌 생동성과 혼란, 모호함, 불편함을 제거해 버린다. 결국 우리는 감각하는 대신, 분석하며 감정을 ‘거세’당한 채로 예술을 대면하게 되는 것이다.
해석의 시대에, 감각은 어떻게 회복되는가
손택은 말한다. “우리는 해석이 아니라 감각을 필요로 한다.” 예술을 설명하려 하지 말고, 그 앞에서 떨리고, 흔들리고, 멍하니 빠져들라는 것이다. 이건 단순히 ‘느끼는 게 먼저다’라는 감상주의가 아니다. 그녀가 말하는 감각은 날것의 몰입이다. 언어 이전의 전율, 해석을 유예한 채로 예술과 동거하려는 태도다.
그녀는 모더니즘의 과잉 해석과 지나친 지성주의를 비판하면서, 예술은 체험되어야 하며, ‘살아 있는 존재 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작품은 의미가 아니라 존재를 환기하는 힘이다. 손택은 예술을 통해 감각의 언어를 되살리고자 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예술 감상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상을 살아내는 감도의 문제다.
예술은 감각의 전투지다
『해석에 반대한다』는 예술 작품 하나하나를 위한 비평이 아니라, 전체적인 문화적 태도에 대한 반성 차눤에서 쓰였다. 손택은 우리가 예술 앞에서 자꾸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 태도 자체를 바꾸라고 제안한다. 이 글은 미학의 선언문이자, 감각의 복권을 외치는 문화적 실천서다.
오늘날 우리는 너무 많은 이미지, 너무 많은 콘텐츠를 접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의미를 붙이고, 문맥을 설명하고, 정답을 구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가 잃는 것은 바로 감각을 통해 얻는 진짜 충격, 혼란, 질문, 그리고 아름다움이다. 손택이 묻는다.
“예술은 당신을 변화시키는가? 아니면 당신의 해석 틀 안에 들어맞기 위해 줄어드는가?”
현대 문화 속 수전 손택의 유효함
손택의 통찰은 지금, 더욱 유효하다.
‘너의 해석이 틀렸어’, ‘그건 이런 의미야’라는 문화 속에서 우리는 감각의 주권을 잃고 있다. 예술 작품을 ‘읽기’ 위해 구글을 검색하고, 영화를 보기 전에 유튜브 해설을 본다. 그 사이에 예술이 줄 수 있는 직접적인 감각의 충격과 개인적 해석의 자율성은 흐려진다.
손택은 말한다. 감상은 해석이 아닌 태도다.
작품을 정복하지 말고, 그 앞에 서 있으라. 흔들리되, 붙잡으려 하지 말라. 그녀는 감상자에게 권유한다.
“그냥 느끼는 것, 그것도 충분히 고귀한 응답이다.”
다시, 감각으로 살아가기 위한 선언
『해석에 반대한다』는 단순한 이론서가 아니다. 이 책은 우리가 예술을 마주할 때마다, 그리고 세상을 바라볼 때마다 꺼내야 할 문장의 나침반이다.
“우리는 해석이 아니라 감각을 필요로 한다.”
이 문장을 품은 사람은, 예술을 넘어 일상도 다르게 본다. 커피 한 잔, 바람이 흔든 커튼, 우연히 마주친 풍경. 그 모든 것이 해석 없이도 존재할 수 있음을 믿는다. 손택은 우리에게 묻는다.
“세상은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느껴지느냐로부터 다시 시작될 수는 없을까?”
마무리 노트
『해석에 반대한다』는 예술과 문화에 대한 깊은 경고이자, 더 나아가 삶의 태도에 대한 제안이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더 많은 것을 ‘설명’하려는 삶에서, 더 깊이 ‘느끼는’ 삶으로 건너가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수전 손택의 『해석에 반대한다』에서 시작한 감각의 복권은 이성과 해석 중심의 근대적 사유를 넘어, 몸과 감각, 존재의 밀도를 중심에 둔 읽기와 보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 연결선상에서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과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은 단순한 후속 독서가 아니라, 한층 더 깊은 “감각적 인문학”의 사유로 이어지는 정교한 독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 책이 어떤 사유를 품고 있으며, 왜 손택 다음에 읽어야 할지를 서사적으로 엮어봅니다.
수전 손택에서 시작해 바르트와 메를로퐁티로 이어지는 길에서, 저는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을 먼저 톺아보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손택이 말한 “해석의 과잉”에 대한 비판을 가장 직접적이면서도 문학적이고 감각적으로 이어가는 이가 바르트이기 때문입니다. 바르트는 이론가이면서도 문장 자체를 유희로 다루는 작가이고, 독자에게 “지적으로 반응하라”는 대신 “몸으로 느끼라”고 속삭이는 유혹자에 가깝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르트는 독서의 행위 자체를 바꿔놓습니다.
조금 넓게 보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정보’로 가득한 세상에서 다시 ‘감각’의 언어를 찾고자 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읽는다는 것의 기쁨과 그 쾌락의 윤리를 탐색한 이 책이 깊이 있는 감각의 실마리를 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읽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 롤랑 바르트 『텍스트의 즐거움』 톺아보기
글자에 유혹당해 본 적 있는가. 문장을 따라가다 문득, 의미가 아닌 감각의 전율이 몰려와 나를 뒤흔든 적 있는가. ‘읽는다’는 것은 꼭 ‘이해한다’는 뜻이어야 할까?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의 에세이집 『텍스트의 즐거움』(1973)은 제목 그대로 읽기라는 행위가 어떻게 ‘쾌락의 장’이 될 수 있는지를 감각적으로 탐색한 책이다. 이 책은 이론이 아니라 하나의 체험이자 사랑 고백이다. 문학이라는 언어의 살결에 빠져든 한 독자의 절절한 탐닉 같은.
“텍스트는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다”
바르트는 해석의 시대에서 반기를 든다. 독자는 더 이상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해석자가 아니다. 그는 텍스트와 함께 숨 쉬는 존재이며, 의미를 ‘찾는’ 대신 의미와 ‘춤추는’ 감각적 존재다.
“나는 텍스트를 해석하려 하지 않는다. 나는 텍스트를 살아내고 싶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쾌락’이다. 바르트는 읽기를 두 가지로 나눈다.
• 즐거움(la plaisir): 익숙하고 안정적인 문장에서 오는 만족.
• 황홀(le plaisir, le jouissance): 낯선 언어, 파열, 예측 불가능성에서 오는 깊은 쾌감.
읽는다는 것은 정해진 의미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에 의해 상처받고 흔들리고 흩어지는 일이다. 문장은 감정선이 아니라 촉각의 선으로 이어져 있다.
해석의 종말, 감각의 복권
바르트는 해석 중심의 비평, 작가 중심의 권위를 모두 벗겨낸다. 작가의 죽음을 선언한 그는, 이제 독자의 탄생을 말한다.
독자는 무력한 해석자가 아니다. 그는 텍스트를 새롭게 읽고, 다시 쓰고, 느끼는 능동적인 존재다. 텍스트는 그가 읽을 때마다 다른 결을 지니며 살아난다.
“읽는 순간마다 문학은 새롭게 태어난다.”
이는 곧 감각의 해방이기도 하다. 언어는 해석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장치다. 문장은 감정이 아닌 감각을 환기시킨다. 단어는 이미지를, 리듬은 촉감을 일으킨다. 몸이 반응하는 읽기. 이것이 바르트의 독서론이다.
읽기의 쾌락, 혹은 사랑
이 모든 사유의 바탕에는 하나의 감정이 흐른다. 사랑이다. 바르트는 읽는다는 것을 끊임없이 연애에 빗댄다.
“나는 텍스트와 사랑에 빠진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나의 감각이 깨어나는 것이다.”
그는 독서를 사랑의 체험, 그 복잡하고 예측 불가능한 파동과 동일시한다. 해석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언제나 뜻밖이며, 논리를 초월하며, 감각과 욕망을 건드린다. 바르트에게 문학은 곧 사랑을 훈련하는 방식이다.
감각의 흐름 속에서, 다시 읽기
『텍스트의 즐거움』은 어떤 ‘정리된 메시지’를 주는 책이 아니다.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일종의 은밀한 산책이다. 의미가 아닌 결을 따라 걷는 일. 그리고 그 여정에서 우리는 ‘읽기’라는 행위에 새롭게 눈뜨게 된다.
다시 말해,
문장은 해석되지 않아도 좋다.
텍스트는 감각의 파동으로 느껴져야 한다.
독자는 이해하는 이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다.
이제 문학은 더 이상 교훈도, 의미도, 지식도 아니다. 문학은 몸이 먼저 반응하는 세계이며, 나를 흔드는 낯선 결이다. 바르트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해석 말고, 사랑하라.”
그리고 당신의 읽기
이 칼럼을 읽고 다시 책을 펼치게 된다면, 이번엔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가?’보다는 ‘무엇이 나를 흔들었는가?’를 물어보길. 어떤 문장이 이상하게 맴돌고, 어떤 리듬이 몸의 긴장을 풀게 만들고, 어떤 낱말이 어딘가의 기억을 환기시켰다면 그게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이다.
감각은 해석보다 오래 남는다. 의미는 잊혀도, 느낌은 흔적을 남긴다.
“세계는 보이기 전에 느껴진다” -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 톺아보기
의미는 언제 시작되는가. 우리는 언제 ‘무언가를 이해했다’고 느끼는가. 언어로? 이성으로? 아니면, 그보다 훨씬 먼저 몸으로, 감각으로?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는 말한다.
“지각은 세계를 여는 열쇠다.”
철학이 오랫동안 이성을 통해 세계를 해석해 왔다면, 메를로퐁티는 감각을 통해 세계와 만난다.
그가 『지각의 현상학』(1945)에서 보여준 것은 단순한 철학 이론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와 나 사이의 촉각적 접촉, 눈보다 먼저 반응하는 살의 사유다.
감각은 사유보다 앞선다
현상학의 흐름에서 메를로퐁티는 '몸'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에 놓는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에 의문을 던진다.
“나는 생각하기 전에 이미 보고 있다.
나는 존재하기 전에 이미 느끼고 있다.”
그는 몸을 단순한 신체적 구조가 아니라, 의미를 만들어내는 감각적 주체로 본다. 우리가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와 ‘접촉’하는 일이다.
즉, 보는 것은 느끼는 것이며, 느끼는 것은 이미 세계를 받아들이는 행위라는 것이다.
해석 이전의 세계’를 믿는 철학
메를로퐁티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기 이전에, 이미 세계는 살을 가진 존재로서 나에게 다가온다고 말한다.
우리는 ‘사유’ 이전의 감각에서,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그 ‘어슴푸레한 것들’ 속에서 살아간다.
이 감각은 고정된 해석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경계선 위의 언어를 선호한다. 분명히 말할 수 없지만, 말하고 싶은 그 어떤 것.
바로 거기에 진실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우리는 사물 속에서 살고, 사물은 우리 안에서 말한다.”
이것은 세계를 감각의 연장선으로 본다는 뜻이다. 인간과 사물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다. 살과 살이 맞닿듯, 우리는 세계를 몸으로 경험한다.
읽는다는 것, ‘지각의 방식’으로
이제 다시 읽는다는 것, 예술을 감상한다는 것으로 돌아와 보자.
우리가 그림을 볼 때, 문장을 읽을 때, 한 편의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메를로퐁티는 말할 것이다.
“당신은 지금 ‘지각하고’ 있다. 의미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살고 있다.”
예술은 해석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몸으로 느껴지고, 감각으로 스며들며, 사유로 이어지는 흐름이다.
언제나 의미가 먼저가 아니라, 느낌이 먼저다.
지각의 현상학이 말해주는 것
『지각의 현상학』은 어떤 철학 교과서처럼 읽히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몸으로 듣는 철학, 혹은 감각으로 짓는 시에 가깝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다음 사실을 새롭게 배운다.
나는 눈으로 보기에 앞서, 이미 세계의 일부이다.
모든 인식은 몸을 통해 이뤄지며, 살은 생각하는 감각이다.
이해는 언어에서 오지 않는다. 지각은 스스로 말한다.
수전 손택 - 롤랑 바르트 - 메를로퐁티
이 사유의 흐름 속에서 우리는 하나의 강을 건너왔다.
손택은 해석을 내려놓고 감상에 귀 기울이라 했고,
바르트는 독자가 쾌락의 감각으로 텍스트를 사랑하라 했으며,
메를로퐁티는 아예 세계를 살결로 인식하라고 말한다.
이 여정은 곧 하나의 제안이다.
세상은 이해가 아니라, 느낌으로 시작된다고.
당신에게 남기는 질문
당신은 지금, 무엇을 ‘지각’하고 있는가?
당신의 눈은 지금, ‘정보’를 보는가, ‘존재’를 느끼는가?
당신이 오늘 읽은 한 문장, 듣는 한 소리, 마시는 한 잔의 커피, 그 모든 순간은 어떻게 당신의 몸에 새겨지는가?
여기서 끝맺기에는 너무 아쉬워 흐름을 조금 더 확장해 볼까 합니다.
감각의 철학이 문학에서 어떻게 살아 숨 쉬는지를 찾기 위해 프루스트, 리글레티, 베르그송, 그리고 바슐라르에게 천천히 다가가 보는 것은 어떨까요? ‘기억의 시간성’과 ‘감각의 순간들’이 교차하는 공간을 먼저 탐험하겠습니다. 여러분과의 동행이 너무나 행복합니다.
기억의 물결 속에서 감각을 따라가다 - 프루스트, 시간의 흔들림 속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7)는 단순히 하나의 소설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철학, 혹은 기억의 현상학이다.
그는 시간을 ‘흘러가는 것’으로 정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억 속에서 살아나는 것, 느껴지는 것으로 보았다. 프루스트의 이야기에서, 시간은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부유하는 감각으로 나타난다.
"한 조각의 Madeleine(마들렌 과자) 속에 잠자는 기억이 깨어난다." - 마르셀 프루스트
프루스트는 단순히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순간’을 다시 느끼는 과정을 묘사한다. 한 입 베어 물었던 마들렌 과자에서 갑자기 깨어나는 어린 시절의 감각. 그의 몸속 깊은 곳에 잠든 감각들이 일깨워진다. 그 순간, 기억은 시간이 아니라 감각으로 되살아난다.
기억을 떠올리려고 해도, 그것은 그저 시간의 흐름 속에 흩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몸이 다시 살아내는 감각의 조각들로 존재한다.
베르그송, 시간은 경험 속에 흐른다
앙리 베르그송은 프루스트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철학자다. 그는 시간을 단순한 측정 가능한 지표로 보지 않았다. 대신, 그는 시간을 ‘경험’으로서 이해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시계 시간’은 외적인 시간에 불과하고, 진짜 시간은 우리가 경험하는 내적 시간(la durée, 지속)이라고 주장했다.
"진정한 시간은 계속 흐르고, 그 흐름 속에서 경험이 쌓여간다. 시간은 경험의 깊이 속에서 비로소 진실을 드러낸다." - 앙리 베르그송
그에게 시간은 고정된 선형적인 흐름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하고 겹쳐지는 감각의 흐름이다. 그리고 이 흐름 속에서 기억은 시간의 흔적을 따라 감각으로 남겨진다.
베르그송의 이론에 따르면, 우리가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그 기억은 고정된 이미지로 되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경험을 재구성하는 새로운 순간이 된다.
리글레티, 음악 속 시간의 흔적
리글레티( György Ligeti)의 음악은 시간을 느끼는 또 다른 방식을 제시한다.
그의 음악에서 시간은 단순한 박자나 리듬을 넘어서, 변화하는 소리의 질감 속에서 물결처럼 흐른다. 리글레티의 작품에서 음악은 감각의 시간을 반영하며, 우리가 흔히 아는 ‘순간’을 넘어서 계속해서 변화하는 기억의 공간으로 이어진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Lux Aeterna》(1966)은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느끼는지에 대한 감각적 탐구하고 있다. 음악은 끝없이 흐르고, 때로는 하나의 순간이 끝없이 반복되기도 하며, 그 안에서 감각과 기억이 충돌하고 융합되는 느낌을 준다.
리글레티의 음악 속 시간은 감각의 지속적인 흐름과 같다. 그 흐름 속에서 기억은 단단하게 형성되지 않으며, 변화하는 감각의 층 위에서 다시 떠오른다.
바슐라르, 꿈과 현실이 만나는 지점
기억과 감각을 다루는 또 하나의 중요한 철학자는 가스통 바슐라르다. 그는 ‘꿈의 철학’을 이야기하며,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 단순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꿈과 상상이 섞여가는 과정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바슐라르는 ‘기억의 방’이라는 개념을 통해 감각적 기억을 회복하는 방식을 이야기한다.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들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꿈처럼 다가오는 감각의 파편들이다.
그는 감각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엿본다. 그에게 기억은 영원히 살아있는 감각의 흐름이며, 이를 통해 우리는 과거와 현재, 꿈과 현실을 넘나드는 시간의 세계에 살고 있는 존재로 드러난다.
감각과 기억의 여정
이렇게 프루스트, 베르그송, 리글레티, 바슐라르를 통해 우리는 ‘시간’과 ‘기억’이 단지 머릿속의 사고나 관념적인 개념이 아니라, 몸으로, 감각으로, 음악으로, 꿈으로 살아 움직이는 존재들임을 깨닫게 된다.
기억은 단순히 ‘이미 지나간 일’을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느끼는 순간마다 다시 살아나고, 변화하는 감각 속에서 떠오른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순간은 시간의 흐름 속에 감각의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다시 기억의 공간을 채우는 순간이 된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다시 살아가고, 감각을 통해 세계와 연결되며, 그 흐름 속에서 시간을 경험하는 존재다.
당신에게 남기는 질문
기억이 떠오를 때, 그것은 무엇을 ‘느끼는’ 순간인가요?
우리가 매일 겪는 감각은 시간을 어떻게 바꿀까요?
감각과 기억이 얽히는 그곳에서, 당신의 시간은 어떻게 흐르고 있나요?
이제, 기억 속에서 흐르는 그 감각을 마음으로, 몸으로 다시 느껴보세요.
감각의 주름 위로, 기억이 빛나는 순간들
기억이란, 꼭 돌이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 그것은 몸이 먼저 알아채는 느낌,
눈앞의 풍경이 아닌 피부 아래를 흐르는 물결입니다.
프루스트가 마들렌 한 조각을 입에 넣었을 때,
그는 사실 입맛으로 기억을 떠올린 것이 아닙니다.
사라진 시간의 향이,
그의 무의식 깊은 곳에서 깨어났던 것이죠.
그리고 우리도, 그런 경험이 있지 않나요?
커피 한 모금이
어느 골목길의 햇살을 떠올리게 하고,
오래 묵은 책장을 넘길 때의 종이 냄새가
어릴 적 학교 도서관 한구석의 먼지를 데려오는.
이건 단지 정보의 회상이 아니라, 감각의 부활입니다.
기억은 언제나 감각과 함께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감각은, 우리가 다시 살아가는 방식이 됩니다.
소리와 시간, 잊히는 것들의 노래
리글레티의 음악에서
우리는 시간의 일직선이 아니라
시간의 겹겹이 쌓인 층을 느끼게 됩니다.
그의 음악은 정지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어떤 멜로디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다른 음과 함께 섞이며 다시 변형되고,
결코 처음과 같은 형태로는 돌아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억도 그렇죠.
과거는 결코 '그대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언제나 새로운 감각 속에서,
다시 쓰이고, 다시 감싸지고,
다시 느껴집니다.
이것이 바로 시간이 감각 속에서 움직이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시계의 바늘이 아니라
감각의 떨림에 반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죠.
바슐라르의 방, 상상과 기억이 함께 쉬는 곳
가스통 바슐라르는 기억을 집에 비유합니다.
기억은 단순히 기록된 사실이 아니라,
상상 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장소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진정한 기억은, 상상 속에서 가장 잘 보존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역설인가요.
기억을 '정확히'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상상과 감각을 통해 '다시 살게 하는 것',
그것이 진짜 기억이라니.
우리 모두는 마음속에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작은 방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요.
그 방은 시간과 감각이 함께 쌓은 공간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자신의 과거와 미래를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존재가 됩니다.
감각으로 쓰는 시간의 문장
이제, 우리는 다시 묻게 됩니다.
기억은 머리에 있는 것일까, 몸에 남아 있는 것일까?
시간은 흐르는가, 축적되는가?
그리고 감각은, 시간의 창문일까, 혹은 기억의 열쇠일까?
이 질문들에 정답은 없지만,
우리는 이 여정을 통해 알게 됩니다.
우리는 감각으로 시간을 기억하고, 감각으로 세계를 해석하며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우리가 다시 느끼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는 것.
마지막에 남는 것은, 감각 그 자체
기억을 잃는다는 건
어쩌면 정보를 잃는 것이 아니라
감각의 층이 흐릿해지는 것일지 모릅니다.
그러니, 우리는 감각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한낮의 햇살, 비 오는 날의 공기,
손끝에 스치는 책장의 질감,
바람이 귓가를 스치는 속도.
이 모든 것이 결국 우리 존재의 깊이를 증명해주는 감각의 문장들입니다.
자, 이제 조용히 눈을 감고,
당신 안의 기억 하나를 꺼내보세요.
그것은 어떤 소리였나요?
어떤 냄새였고, 어떤 빛깔이었나요?
그 안에 있던 당신의 감각을, 지금 다시 느껴보세요.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걸어가는 인문학의 길입니다.
이번엔 조금 더 깊고 사적인 문장으로,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 속으로 들어가 볼까요?기대해 주세요.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