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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석에 반대한다(2) 보라

by 콩코드


텍스트를 사랑한다는 것 – 바르트의 느린 독서법


“나는 그 문장에서 기쁨을 느꼈다.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그렇다.”


롤랑 바르트는 해석의 방식이 아니라, 몸의 반응을 기준으로 글을 읽는다. 그는 독서에 ‘즐거움’이란 감각을 되살려 놓는다. 분석하려 들지 않고, 오히려 텍스트 안에서 길 잃기를 바란다.

그는 말한다.


“쾌락을 주는 텍스트는 나를 분열시키고, 나를 분산시키며, 나를 잃게 한다.”


그렇게 텍스트는 독자를 ‘지식의 주체’가 아니라 몸과 감각의 수용자로 만든다고.

이건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이다.

독서는 더 이상 ‘해석’이 아니라

반응이며, 몰입이며,

‘어떻게 느꼈는가?’가 가장 정직한 독법이라는.


텍스트는 거울이 아니다. 나를 찢는 칼날이다

바르트는 ‘쾌락의 텍스트’와 ‘기쁨의 텍스트’를 구분한다.

기쁨의 텍스트는 쉽게 읽히고, 나를 위로하고 안도시킨다.

하지만 쾌락의 텍스트는 다르다.


그것은 내 안의 익숙한 틀을 흔들고,

내 몸의 언어를 낯설게 만들며,

결국엔 ‘나’를 재구성하게 한다.


"진정한 독서는, 나를 불편하게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읽고 무의식적으로 움찔하거나,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고 오래 머무는 순간들이 있다.

바르트는 그 ‘정지의 순간’에 쾌락이 있다고 말한다.

텍스트는 내 안의 언어를 흔들고,

읽는 자를 감히 바꾸는 것이다.


저자의 죽음, 독자의 탄생

그 유명한 선언이 이 책의 가장 날카로운 문장 중 하나다.


“저자는 죽었다.”


우리는 종종 "이 문장의 진짜 뜻은 무엇인가요?"

"이 글에서 작가가 말하려는 의도는 뭔가요?" 하고 묻는다.

하지만 바르트는 단호하다.


“글을 쓰는 순간, 그 뜻은 사라진다.

그 텍스트는 이제 ‘읽는 자의 것’이다.”


이건 무책임한 선언이 아니다.

오히려 읽기의 자유를 완전히 독자에게 돌려주는 해방이다.

저자가 독자의 세계를 강요하지 않도록,

독자의 감각과 사유가 살아나도록 바르트는 저자의 이름을 지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감히 말할 수 있다.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느꼈다”라고.


텍스트의 어둠 속에서 느릿하게 길을 잃는 기쁨

바르트의 독서는 느리다.

서두르지 않고, 분석하지 않으며,

그 문장 하나하나를 혀로 굴리듯 음미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텍스트는 살 속에 남는 언어의 상흔이다.”


그 말이 떠오를 때,

문장이 더 이상 정보나 의미가 아니라

내 몸 안 어딘가에 남겨진 감각의 여운처럼 느껴진다.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이건 독서가 아니라, 사랑에 더 가까운 경험이라는 것을.


그리고 지금, 당신이 느끼는 그 감각

당신은 지금 어떤 문장에 오래 머물렀나요?

어떤 단어에 가슴이 조금 더 두근거렸나요?

그게 바로 당신만의 독서, 당신만의 바르트입니다.

이 책은 결코 독해되길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함께 느껴지길 바랄 뿐입니다.

누군가는 무심히 넘기고,

누군가는 그 문장에서 오래 울 수도 있습니다.

그 모든 반응이, 진실한 독서의 감각입니다.


다음으로 연결될 책의 실마리

이제 바르트의 언어를 따라

몸이 조금 더 예민해졌다면,

우리는 더 오래, 더 깊이 감각의 철학으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 여정은

모리스 메를로퐁티, 『지각의 현상학』.입니다.

언어보다 먼저 반응하는 몸,

사유보다 더 빠르게 감각하는 존재로서의 나,

그 물결 같은 철학의 숲으로,



‘나는 본다, 고로 존재한다’ – 감각의 철학, 메를로퐁티


우리는 익숙하게 이렇게 말한다.

“생각하므로 존재한다.”

하지만 메를로퐁티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나는 느낀다. 나는 지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말한다.

세계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느껴지는 것’으로 존재한다고.

생각보다 더 먼저,

말보다 더 빠르게,

나의 몸은 세상에 반응하고 있다고.


지각은 감각이 아니다 – ‘살’이라는 접촉의 언어

‘감각’과 ‘지각’은 다르다.

감각은 단순한 자극이고,

지각은 그것을 ‘의미 있는 전체’로 받아들이는 행위다.


예를 들어,

햇살이 따사롭다고 느끼는 그 순간,

우리는 단순히 피부에 빛이 닿았다고만 여기는 게 아니다.

어느 봄날의 기억, 여유, 설렘, 혹은 외로움까지도 함께 떠오른다.


메를로퐁티는 그 모든 과정을 ‘살(flesh)’의 교감이라 부른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와 세계가 만나는 지점,

그것이 바로 ‘살’, 그리고 지각이다.


언어보다 먼저 오는 세계 – ‘전(前) 의식적’ 경험

우리는 설명할 수 없지만,

어딘가 낯익은 공간,

불현듯 울컥하는 감정,

이미 알고 있는 듯한 장면을 마주할 때가 있다.


이건 언어로 설명되기 이전의 경험이다.

메를로퐁티는 이걸 ‘전(前) 의식적 지각’이라 부른다.

우리는 사유하기 전에 이미 세계 안에 깊이 들어가 있었고,

언제나 살의 감각으로 세계와 접촉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생각은 말보다 앞서 오지 않는다.

말이 생각을 낳는 것이 아니라, 몸이 세계를 지각함으로써 사고가 시작된다.”


타인을 본다는 것, 나를 본다는 것

감각의 철학은 결국 관계의 철학이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낀 순간,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의식한다.

거울 없이도 누군가의 존재가 ‘나’라는 세계를 바꾼다.


그 순간,

우리는 단절된 ‘나’가 아니라,

세상의 일부로서

끊임없이 주고받는 살의 네트워크 안에 존재하게 된다.


이건 존재론의 혁명이자,

감각에 대한 가장 시적인 선언이기도 하다.


결국, 우리는 ‘느끼는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

메를로퐁티의 철학은

‘이성’의 중심에서 벗어나,

몸과 감각, 관계의 장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는 이론보다 살결을 믿는다.

개념보다 햇살과 바람의 언어를 중시한다.

그래서 그의 철학은,

살아 있는 독서로 다가온다.


어떻게 읽으면 좋을까?

『지각의 현상학』은 분명 쉽지 않은 책이다.

그러나 ‘철학을 산책하듯’ 느끼고 싶다면,

이 책은 강이 되어 천천히 흐른다.


‘감각’은 단순한 감지인가, 의미인가?

‘나의 몸’은 나인가, 나 아닌가?

‘말’은 생각의 결과인가, 감각의 연장인가?


이런 질문을 품고 읽는다면,

어느 순간 문장이 스스로 환히 열릴 것이다.



다음 발걸음 – 우리가 걸어갈 새로운 감각의 지평

이제, 당신이 조금 더 살의 감각에 민감해졌다면,

우리 다음엔 어디로 갈까요?

혹시… 빌렘 플루서의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어떠세요?

언어의 시대를 지나

‘이미지’로 말하는 오늘의 감각을 다시 묻는 책입니다.

기호가 흐르고, 감각이 증식되는 시대에

‘이미지’는 어떻게 생각을 대체하는가?에 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어느덧 오후의 햇살이 조금 더 기울었습니다. 시침이 오후 2시를 향하고 있네요.

오늘 감각은 어떤가요?

어느 문장에서, 어느 생각에서

당신은 잠시 머물러 있었나요?


이번에는 빌렘 플루서의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원제: Für eine Philosophie der Fotografie)를 천천히 톺아보며, 이미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사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함께 되짚어보겠습니다.


사진은 기록이 아니라 사유다 - 빌렘 플루서,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 톺아보기


“사진을 보는 법은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기술적 이미지’란 무엇인가

플루서는 사진을 기술적 이미지로 정의한다. 이는 회화나 언어처럼 인간의 직접적인 표현이 아니라, 기계(카메라)의 프로그램에 따라 생성된 이미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환상을 버리는 일이다. 사진을 찍는 인간은 사실상 장치가 허락한 프레임 안에서만 작동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창조자는 누구인가? 바로 ‘프로그램’이다.


“기술적 이미지는 세계에 대한 새로운 코딩이다.

그 코드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가 짜놓은 것이다.”


사진은 세계를 ‘보게’ 하는가, ‘가리게’ 하는가

우리는 사진이 현실을 충실히 반영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플루서는 사진이 ‘진실’을 보여주기보다는, 현실을 특정 방식으로 가공해 보여주는 장치라고 말한다. 사진은 해석 없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기계와 인간의 선택에 따라 구성된 환영에 가깝다. 사진은 투명한 창이 아니라, 불투명한 거울이다.


플루서는 묻는다.


“우리는 사진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이해의 환상 속에 갇혀 있는가?”


사진가도 프로그램의 일부다

플루서에게 사진가는 더 이상 예술가가 아니다. 사진가는 기계가 제공하는 가능한 조합 중에서 선택하는 ‘운영자’에 가깝다. 카메라는 프로그래밍된 가능성의 공간이고, 사진가는 그 안에서 움직이는 하나의 요소다.


이러한 체계는 현대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 있다. 이미지는 상품이 되고, 시선은 통제되고, 감각은 점점 ‘자동화’된다. 사진가는 자유롭게 창작하는 존재가 아니라, 프로그램 안에서 ‘무한 반복’을 재생산하는 존재다.


사진에 대한 비판적 문해력, 그것이 철학이다

플루서는 말한다. 사진을 철학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진의 미학을 논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이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에 질문을 던지고, 그 이미지가 우리 인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성찰하는 것이다.


“사진을 단순히 소비하지 말라.

그것이 무엇을 말하고 있고, 왜 그렇게 말하는지를 해독하라.”


그것이 곧 이미지를 사유하는 법이며, 이미지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가장 기본적인 철학적 태도다.


〈요약 정리〉


핵심 개념 내용

기술적 이미지 기계(카메라)의 프로그램에 의해

생성된 이미지

프로그래밍 사진가는 기계의 프로그램 안에서

움직이는 ‘연산자’

현실과 사진 사진은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성’하는 것

이미지의 문해력 사진을 비판적으로 읽는 능력은

이미지 시대의 필수 지성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롤랑 바르트, 『밝은 방』 – 사진 이미지에 대한 사랑과 상실, 감성의 철학

발터 베냐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 아우라의 소멸과 재현의 정치학

장 보드리야르, 『시뮬라시옹』 – 이미지가 현실을 대체하는 포스트모던 세계


〈마무리하며〉


『사진의 철학을 위하여』는 카메라를 손에 쥔 모든 이가 읽어야 할 철학적 성찰의 거울이다. 이 책은 단순히 사진에 관한 책이 아니다. 이는 시대를 읽는 법, 그리고 이미지와 권력, 자유, 진실 사이의 긴장을 감각하는 법에 관한 깊은 질문이다.

이제 사진 앞에 섰을 때, “이건 잘 찍었네”가 아니라

“이 사진은 어떤 프로그램의 결과물이지?”라고 물을 수 있는 시선을 가지게 된다.

그것이 플루서가 말한 ‘철학하는 사진가’,

그리고 ‘이미지를 살아내는 철학자’의 시작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걸어온 길,

수전 손택과 빌렘 플루서를 거쳐 이미지, 감각, 해석과 존재의 문제를 사유해 왔지요.

그 여정을 인간이라는 존재의 근본 조건으로 확장해줄 사상가로 저는 한나 아렌트를 떠올렸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존재의 무게, 말과 행위의 빛으로


“인간은 무엇으로 존재를 증명하는가?”

아렌트는 대답한다.

“우리는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세상 속에 자신의 존재를 새긴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은

인간이 단순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로 기억되기 위해’ 행위하고 말하는 존재임을 강조하는 책이다.

이 책은 철학, 정치, 역사, 문학을 가로지르며 인간의 본질적 활동을 세 가지로 나눈다.


노동(Labor)

"인간은 먼저 ‘살기 위해’ 일한다.“


노동은 생물학적 삶을 유지하기 위한 반복적인 활동이다.

밥을 짓고, 몸을 씻고, 잠을 자고, 다시 깨어나는 것.

이러한 행위는 ‘지속’되지만,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아렌트에게 노동은 인간의 동물성에 가까운 활동이다.


현대 사회는 이 ‘노동’의 가치를 지나치게 신성시한 결과,

인간의 다른 중요한 조건들, 즉 말하기, 정치, 창조를 소외시켰다고 말한다.


작업(Work)

"인간은 도구와 사물을 만들어 ‘세상’을 구축한다.“


노동이 생명을 위한 행위라면, 작업은 세계를 위한 창조다.

건축가가 도시를 짓고, 장인이 탁자를 만들며, 예술가가 작품을 남기는 일.

이러한 활동은 세상을 물리적으로 변화시키고, 인간에게 안정적인 거처를 제공한다.


작업은 영속성을 추구한다.

언젠가는 내가 사라져도, 내가 만든 것은 남기를 바라는

그런 인간의 내면적 열망이 깃들어 있다.


행위(Action)

"진정한 인간은, 다른 인간과 함께 새로운 세계를 시작한다.“


행위는 가장 인간적인 활동이다.

누군가와 함께 ‘공적 세계’에 참여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

아렌트는 이 행위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고귀한 조건이라고 본다.


여기서 핵심은 ‘누구로서’ 존재하는가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느냐보다,

내가 어떤 말과 행동으로 기억되느냐가 중요하다.


『인간의 조건』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단순히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존재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보다도,

‘기억되는 방식’이다.

그 기억은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함께한 사람들과의 말과 행동 속에서 생겨난다.


〈오늘의 질문〉


“당신은 누구로 기억되길 바라나요?”

“당신의 말과 행위는, 어떤 세계를 시작하고 있나요?”


〈이어 읽기를 위한 추천〉


인간 조건의 정치성: 『정치의 기원』 - 한나 아렌트

말과 기억의 존재론: 『기억, 역사, 망각』 - 폴 리쾨르

공존의 감각: 『공통감각』 - 자크 랑시에르



행위와 탄생: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인간의 조건


“모든 행위는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다.”

– 한나 아렌트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행위’를 단순히 움직임이나 어떤 일의 실행으로 보지 않았다.

그녀에게 행위란, 세상에 ‘나’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더불어, 그 행위는 언제나 새로운 시작, 즉 ‘탄생’과 연결된다.


탄생(natality): 인간의 가능성은,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아렌트가 말하는 ‘탄생’은 생물학적 출생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 있는 능력을 타고났다는 뜻이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존재다.

이 가능성은, 우리가 말하고, 행동하고, 약속하고, 용서할 때

비로소 현실이 된다.


“탄생은 가능성이다.

그리고 행위는 그 가능성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을 현실로 만든다.”


말하기와 행동하기: ‘나’를 세상에 드러내는 방식

행위(action)는 언제나 ‘말(speech)’과 함께 일어난다.

말이 없다면 행위는 그 의미를 전달하지 못하고,

행위가 없다면 말은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하다.


말과 행위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하는 자’가 아니라

‘누구인지’ 드러내는 자가 된다.

내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누구로서 살아냈는가가 중요하다.


행위의 아름다움은, 예측 불가능성에 있다

아렌트는 행위의 가장 본질적인 성격으로 예측 불가능성을 꼽는다.

우리는 어떤 말이나 행동이 어떤 반응을 낳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불확실성 속에

세상은 끊임없이 열리고, 갱신되며, 깊어진다.


"진정한 행위는, 이전에 없던 것을 가능하게 하는 창조다."


이것이 아렌트가 민주정치를 사랑한 이유다.

공적인 공간 속에서 다양한 인간들이 만나,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함께 새로운 이야기를 쓰는 것.

그게 바로 인간다운 세계의 시작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우리는 살아 있음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를 시작함으로써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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