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로 도망치고 나면 되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가끔씩 우리는 그저 도망치고 싶어 한다. 어디로든.
– 세라 망구소, 《300개의 단상》
가방을 싸지 않아도, 표를 끊지 않아도, 마음은 이미 떠나고 있을 때가 있다. 그곳이 어디든, 지금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도망치고 싶어진다. 그것은 나약함의 표식이 아니라, 살아 있으려는 본능 같은 것이다.
나는 종종 문득 사라지고 싶어진다. 삶이라는 이름의 바쁜 도로 위에서 잠시 갓길에 차를 세우듯, 아무도 모르는 시간 속으로 빠져들고 싶어진다. 그 순간에는 목적지도, 이유도 없다. 그저 ‘여기’가 아닌 ‘어디든’이면 좋다. 바람 부는 들판일 수도 있고, 아무 말 없는 바닷가일 수도 있다. 심지어 아무 것도 없는 낯선 방 한켠일 수도 있다.
망구소는 말한다. 도망친 뒤에는 되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그 문장을 읽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도망침이 끝이 아니라는 걸, 그리고 돌아옴은 늘 조금씩 늦게 찾아온다는 걸 우리는 너무 잘 안다. 마치 집을 나섰다가도 다시 돌아올 때, 문 앞에서 한참 망설이다가야 겨우 문고리를 잡을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되돌아오는 시간이 아니라, 되돌아올 수 있는 용기를 되찾는 시간이기도 하다.
하지만 가끔, 정말 가끔은 그렇게까지 생각하지도 못한다. 그저 도망치고 싶다. 어디로든.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지금 떠나지 않으면 내가 나를 잃어버릴 것만 같을 때. 그런 순간을 누가 과연 살아가며 단 한 번도 마주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도망이 나를 회복시키고, 어쩌면 다시 나로 돌아오게 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니 나는 이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다. 삶이 벅찰 때는 잠시 숨는 것도, 걸음을 멈추는 것도 필요하다. 중요한 건 어디로 갔느냐가 아니라, 언젠가 돌아올 나를 위한 여백을 남겨두는 일이다.
세라 망구소의 문장처럼, 우리는 어딘가로 도망치고 되돌아오는 시간을 함께 품고 살아간다. 어쩌면 인생이란, 끊임없이 도망치고 돌아오는, 그 사이의 여정을 기록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