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편 양화(陽貨) 제8장
공자가 말했다. “중유야! 너는 6가지 미덕의 6가지 폐단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느냐?” 자로가 대답했다. “못 들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앉아라. 내가 일러주마. 어짊을 좋아하면서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리석음이다, 지혜를 좋아하면서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허황함이다, 신의를 좋아하면서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남을 헤치는 것이다, 정직함을 좋아하면서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각박함이다. 용맹함을 좋아하면서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난동이고, 굳센 걸 좋아하면서 배움을 좋아하지 않으면 그 폐단은 경솔함이다.”
子曰: “由也, 女聞六言六蔽矣乎?” 對曰: “未也”
자왈 유야 여문육언육폐의호 대왈 미야
“居. 吾語女. 好仁不好學, 其蔽也愚. 好知不好學, 其蔽也蕩. 好信不好學, 其蔽也賊.
거 오어녀 호인불호학 기폐야우 호지불호학 기폐야탕 호신불호학 기폐야적
好直不好學, 其蔽也絞. 好勇不好學. 其蔽也亂. 好剛不好學, 其蔽也狂.“
호직불호학 기폐야교 호용불호학 기폐야란 호강불호학 기폐야광
공자가 제자에게 맞춤형 가르침을 펼친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는 장입니다. 유(由)는 중유(仲由)를 말하니 공자의 수제자 자로입니다. 자로의 장점은 불의를 참지 못하는 상남자라는데 있습니다. 단순하지만 솔직하고 질박하지만 두려움 모르는 터프가이였습니다. 그래서 “한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을 외치며 반평생 공자의 보디가드 겸 마부 노릇을 도맡은 우직한 사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칼 차고 활 쏘고 말 몰는 것을 더 좋아해 책상 앞에 앉아 책읽기를 싫어하고 악기 연주는 젬병이었기에 옥골선풍의 군자상과 거리가 멀다는 약점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 자로를 위해 공자는 ‘육언육폐(六言六弊)’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서 요즘 말로 ‘피싱(낚시질)’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 뻣뻣하게 서있는 자로를 주저앉히고서 타이르듯 가르침을 펼칩니다. 육언이란 곧 여섯 가지 미덕을 말하니 인(仁) 지(知) 신(信) 직(直) 용(勇) 강(剛)입니다. 앞의 둘 곧 어짊과 지혜로움은 공자가 늘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뒤의 넷, 곧 약속하면 반드시 지키고, 올곧고, 용감하고, 굳센 것은 자로가 좋아하는 덕목입니다. 공자가 늘 강조하던 인과 지로 피싱한 뒤 평소 자로가 좋아하던 신, 직, 용, 강의 약점을 파고듭니다. 곁에 눈치 빠른 자공이 있었다면 웃음을 참느라 빨개 진 얼굴을 옆으로 돌리고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핵심은 ‘학문을 좋아하지 않으면’에 있습니다. 공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런 게 아니었나 싶습니다. “자로야 내가 어짊과 지혜로움을 강조하긴 하지만 호학하지 않았다면 우매(愚)하거나 허황(蕩)된 사람이 되고 말았을 거야. 마찬가지로 네가 아무리 신의가 있고, 올곧고, 용감하고, 굳세더라도 호학하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을 해치는 도적이 되거나(賊) 각박한 사람이 되거나(絞), 반란을 일으키거나(亂), 경솔하게 미쳐 날뛰게 될 것(狂)이다.”
책상머리에 앉아 차분히 공부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키우지 않으면 주화입마(走禍入魔)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사람들은 자로가 이런 공자의 경고를 등한시한 결과 섶을 짊어지고 홀로 불속으로 뛰어들어 무모한 죽음을 맞았다고들 합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당시 자로는 위(衛)나라 집정대부였던 공회의 읍재(邑宰)였습니다. 당시 위나라 제후는 위출공(희첩)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희괴외(훗날의 위장공)는 본디 위나라 세자였으나 자신의 계모인 남자((南子)를 죽이려다 폐세자 되고 국외로 추방됐기에 남자가 괴외의 아들이었던 첩을 제후로 추대했던 것입니다. 권토중래를 노리던 괴외는 자신의 여동생인 공백희를 앞세우고 소수정예의 병력을 동원해 공백희의 아들이자 자신의 이종조카인 공회를 겁박해 반란을 일으키겠다는 맹세를 받아냅니다.
이 소식을 접한 자로는 그날 밤 괴외와 그 수하가 장악한 위나라 도성(초구) 안으로 홀로 들어가 공회를 즉각 풀어주지 않으면 누대(성의 사령탑)를 불태우겠다고 일대 소동을 피웁니다. 또 공회를 풀어주지 않을 거면 “주군을 바꿔 섬기려는 자이니 잡아 죽이라”고 요구했다고 합니다. 간신히 공회를 한편으로 끌어들였던 괴외는 그런 자로 때문에 공회가 동요할까 봐 무사 둘을 보내 자로를 처단하게 합니다. 환갑을 넘긴 나이의 자로는 홀로 둘을 상대로 사투를 벌이다 초연히 죽음을 맞습니다. 교전 중에 갓끈이 끊어지자 “군자는 의관을 정제하고 죽음을 맞아야 한다”며 갓을 바로 쓰고 칼을 맞았다고 합니다.
당시 공자 제자 중에 자고(子羔‧본명은 고시‧高柴)도 자로와 함께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습니다. 자고는 공문72현에 포함되는 제자로 5척 단구였지만 우직하여 그보다 스무 살가량 많은 맏사형 자로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자로가 노나라에서 계손씨 가문의 가재를 할 당시 자고에게 비읍의 읍재(邑宰)를 맡겼다가 공자에게 잔소리를 들었는데 위나라로 가서 벼슬을 살 때도 자고를 데리고 갔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자고는 반란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듣자 바로 형세가 기울었음을 눈치채고 도성을 빠져나갑니다. 그러다 거꾸로 도성으로 오는 자로를 보고 “성문은 이미 폐쇄됐다”면서 분란에 말려들지 말고 함께 몸을 피하자 합니다. 실제 위출공은 반란 소식을 듣자마자 그 즉시 수레를 타고 제나라로 도망가 버렸습니다. 하지만 자로는 “녹을 받아먹은 사람으로서 주군이 위험에 처했는데 그냥 두고 갈 수 없다”면서 산초 판자도 없이 단기필마로 풍차를 향해 돌진하는 돈키호테라도 되는 양 사지로 뛰어들어 죽음을 맞은 것입니다.
그런 자로의 행동을 공자가 말한 우(愚) 탕(蕩) 적(賊) 교(絞) 난(亂) 광(狂)의 육폐(六弊) 중의 어디에 해당한다고 보십니까? 굳이 꼽으라면 우(愚) 난(亂) 광(狂) 중 하나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어질되 상대(공회)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용감하되 승산을 계산할 줄 몰랐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또 굳세되 후일을 도모하는 법을 몰랐다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보다는 자로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신념에 투철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그의 나이가 예순셋. 평균수명이 쉰도 안 되던 춘추시대이니 후일을 도모하거나 새로 모실 주군을 찾아 나서기엔 너무 많은 나이였습니다. 또 반평생 그 보디가드를 자임했던 스승 공자도 정치일선에서 물러나 모국인 노나라에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보내고 있을 때이니 스승에 대한 의무감도 덜어낸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공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평생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았던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을 실천하며 최후를 맞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말 그대로 ‘이로움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험한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치라‘를 온몸으로 보여주고 떠난 것이니 스승인 공자조차 그 선택에 대해 결코 우(愚) 난(亂) 광(狂)을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로의 선택은 신(信) 직(直) 용(勇) 강(剛)이라는 타고난 덕목에 스승에게서 배운 인(仁)과 지(知)를 가미해 의리와 명분을 갖춘 명예로운 죽음을 택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마땅히 공자의 가르침에 충실한 호학(好學)의 산물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