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편 양화(陽貨) 제7장
필힐이 초청하자 공자가 가려고 했다.
자로가 말했다. “이전에 스승님이 저 유에게 가라사대, ‘몸소 나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군자가 들어가지 않는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필힐이 중모에서 모반을 일으켰는데 스승님께서 가시려고 하니 어찌 된 일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렇다.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런 말도 있지 않더냐. 견고하다 말하지 않겠느냐, 갈아도 닳지 않으니. 희다고 말하지 않겠느냐, 검게 물들여도 검어지지 않으니. 그렇다고 내가 무슨 조롱박은 아니지 않느냐, 매달려 있기만 하고 아무도 먹을 생각을 안 하는 그런 조롱박 말이다.”
佛肹召, 子欲往.
필힐소 자욕왕
子路曰: “昔者由也聞諸夫子曰: ‘親於其身爲不善者, 君子不入也.’ 佛肹以中牟畔, 子之往也, 如之何?“
자로왈 석자유야문저부자왈 친어기신위불선자 군자불입야 필힐이중모반 자지왕야 여지하
子曰: "然, 有是言也. 不曰堅乎, 磨而不径. 不曰白乎, 涅而不緇. 吾豈匏瓜也哉? 焉能繫而不食?
자왈: 연 유시언야 불왈견호 마이불린 불왈백호 열이불치 오개포과야재 언능계이불식
필힐(佛肹)은 북방의 강대국이던 진(晉)나라 중모(中牟) 지역의 읍재(邑宰)였다가 자신이 모시던 대부에게 반란을 일으켜 독자적 세력 구축에 나선 인물이었습니다. 필힐이라는 한자이름을 살펴보면 佛은 부처란 뜻 외에 크다와 어그러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를 불이 아니라 필로 발음할 때는 ‘도울 필’로 새깁니다. 佛은 拂의 대처어이기도 한데 거기엔 털다, 돕다 외에 어그러지다, 거스르다는 뜻이 있습니다. 또 肹은 ‘소리 울릴 힐’로 역시 목소리가 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필힐이란 이름에는 ‘주군의 뜻을 거스르고 반란을 일으킨 목소리 큰 사람’이란 함의가 담겨 있습니다.
역사서에 등장하지 않는 인물로 중모의 위치가 어딘지 또 필힐이 반기를 든 진나라 대부가 누구였는지도 분명치 않습니다. 당시 진나라 정세는 그만큼 복잡했습니다. 노나라에 3환이 있듯이 진나라에는 6경(六卿)이라 하여 지(智)·범(范)·중항(中行)·한(韓)·위(魏)·조(趙) 씨 6대 권문세가가 있었습니다. 기원전 497년 진정공(晉定公) 시절 6경 간에 내전이 발생했습니다. 처음엔 조 씨 가문의 종주인 조간자(趙簡子·조앙)를 상대로 범 씨 가문의 종주 범길석(范吉射)과 중항 씨 가문의 종주 중항인(中行寅)이 싸움을 벌여 조간자가 밀리게 됐습니다, 진정공이 이를 중재하려 하자 범·중항 씨 가문이 진정공에게까지 반기를 듭니다. 그러자 지‧한‧위 씨가 조간자의 편에 서서 범 씨와 중항 씨 세력을 진나라에서 축출하게 됩니다.
필힐은 그 와중에 자신의 주군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조간자의 가신이네, 한씨의 가신이네 여러가지 설이 엇갈립니다. 한대 이후의 유학자들은 필힐의 주군이 누구인지가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성인인 공자가 초대에 응할 생각을 했다는 것은 필힐의 반란이 나름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리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에는 그리 중요해 보이진 않습니다. 당시 공자는 천하주유라 하지만 떠돌이 신세를 면치 못하면서 ‘상갓집 개처럼 궁상맞아 보인다’는 평을 듣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죽 답답했으면 제후국도 아니고 제후국 경대부의 가신이 불러준다고 달려갈 생각을 다했을까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합니다.
그때 공문의 ‘미스터 쓴소리’ 자로가 나서서 브레이크를 겁니다. ‘아니 언제는 군자는 착하지 못한 짓을 벌인 사람들 무리 속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더니 주군에게 반기를 든 사람이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가려 하느냐’고 따지고 나선 것입니다. 까칠한 원칙주의자 자로가 그렇게 따박따박 따지고 들자 속으론 ‘야 인마, 내가 오죽하면 그러겠냐’라고 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던 공자가 에둘러 신세한탄을 늘어놓은 겁니다.
“내가 그런 말 한 것을 부인하진 않겠다. 하지만 지금은 잠시라만이라도 몸을 의탁할 곳이 필요해서 그런 거 아니냐. 필힐이 어떤 사람인지는 직접 만나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 설사 그 사람이 악당이라도 해도 내가 그런 놈에게 동화될 듯싶으냐. 나는 아무리 갈아도 닳지 않는 벼루와 같고 아무리 물들이려 해도 물들지 않는 백지(당시엔 흰 죽간) 같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그 속 안이 쓰고 먹을 게 없어서 장식용으로만 매달려있는 조롱박 신세는 면해야 하지 않겠느냐. 내 안의 식견과 역량을 박박 긁어먹어 줄 그 누군가를 만나려면 일단 부딪혀 봐야 하지 않겠느냐?”
이는 신세한탄과 푸념에 그쳤을 뿐입니다. 공자는 결국 필힐을 찾아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천하주유 기간 내내 반복됩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반백 년간 갈고닦은 자신의 역량을 천하를 위해 발휘해보고 싶었던 공자는 자신을 기용해줄 주군을 애타게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헐값에 넘기는 짓은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명분싸움과 기싸움에서 밀리게 되면 자신이 뜻한 바를 제대로 펼칠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한번 굽히고 들어가면 잘못된 명령이라도 끽소리 못하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겁니다. 첫 단추부터 잘 꿰어야 마지막 단추까지 꿸 수 있는 게 공자가 꿈꾼 정치의 본질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채용되고 난 뒤 숨겨진 능력 발휘로 주군의 마음을 사로잡자는 취업전략을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양화 편 7장은 그런 공자의 취업전략을 무의식적으로 드러내 보여줍니다. 공자는 그저 장식용으로 매달려 있는 조롱박이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보단 아무리 먹을 갈아도 닳지 않는 벼루나 그 벼루에 담긴 먹물을 담뿍 찍어서 자신의 소신과 식견을 맘껏 적어 내려갈 수 있는 백지(당시엔 죽간)처럼 실무에 절실히 필요한 존재가 되길 원했던 겁니다. 자신의 뇌수를 벼루 삼고 자신의 심장을 백지 삼아 일필휘지의 명문을 써내려가 혼란한 춘추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싶다고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하지만 공자를 벼루로 삼고 백지로 삼아 희망의 격문을 쓰려는 제후가 아무도 없었으니 도반이나 다름없었던 제자의 뼈아픈 일침이 더욱 더 사무쳤을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