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편 양화(陽貨) 제5장
공산불요가 비(費)읍을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킨 뒤 공자를 초청하자 공자가 가고자 했다. 자로가 언짢아하며 말했다. “가실 곳이 없으면 그만 두실 일이지 하필이면 공산씨에게 가려 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나를 부르는 사람이 하릴없이 부르기야 하겠느냐? 만일 나를 써주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그 나라를 동방의 주나라로 만들 것이니라!”
公山弗擾 以費畔, 召, 子欲往. 子路不說曰: “末之也已, 何必公山氏之之也?”
공산불요 이비반 소 자욕왕 자로불열왈 말지야이 하필공산씨지지야
子曰: “夫召我者, 而豈徒哉? 如有用我者, 吾其爲東周乎!”
자왈 부소아자 이개도재 여유용아자 오기위동주호
공산불요(公山弗擾)는 노나라의 실권자인 계손씨의 가신으로 노나라 수도 곡부에서 동쪽으로 200리쯤 떨어진 계손씨 영지의 성도인 비(費)읍의 읍재였습니다. 춘추좌전에는 공산불뉴(公山弗狃)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그는 계손씨의 가재(家宰)였던 양호(양화)와 손을 잡고 기원전 505년 계손씨 가문의 7대 종주인 계환자(계손사)를 굴복시키고 계환자의 서제인 계오(季寤)를 종주로 내세우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양호는 노나라 실권을 장악한지 2년만인 기원전 501년 계손씨, 숙손씨, 맹손씨 3환 가문의 반격으로 제나라로 망명하게 됩니다.
양호의 망명에도 공산불요는 독자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인지 이후에도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다 공자가 계손씨의 성도인 비(費), 숙손씨의 성도인 후(郈), 맹손씨의 성도인 성(郕)의 성곽을 허무는 ‘삼도도괴(三都倒壞)’를 추진하자 그에 반발해 기원전 498년 병력을 이끌고 곡부까지 쳐들어왔다가 패퇴하고 양호의 뒤를 따라 제나라로 망명하게 됩니다. 계환자가 자신의 성도인 비성의 성곽을 무너뜨리는 것에 동의했던 이유도 공산불요가 비성을 장악하고 있었기에 이를 약화시키려는 포석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렇다면 공산불요가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초빙했다는 시기는 언제일까요? 그가 노나라 수도 곡부로 병력을 끌고 쳐들어온 기원전 498년은 아닐 것입니다. 이때 공자는 당시 노나라 제후인 노정공 직속의 대사구의 직책에 있었기에 노정공을 옹위하며 공산불요의 병력을 패퇴시키는데 앞장을 섰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양호와 손을 잡고 삼환 정치에 반기를 든 기원전 505년부터 공자가 노정공 영지였던 중도(中都)의 읍재를 맡으며 본격적 공직진츨을 시작한 기원전 502년 무렵 사이의 어느 때였다고 봐야 합니다.
당시 공자는 삼환 정치에 대해 반기를 든 양호와 공산불요에게 살짝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노나라 정치의 우환으로서 삼환 정치의 폐단을 매섭게 비판해왔기에 그 삼환 세력을 제거하거나 약화하려 한 것에 처음엔 공감했을지 공산이 큽니다. 마침 양호가 공자의 출사(出仕)를 적극 권유하고 나선 때이기도 합니다. 당시 공자도 반승낙을 한 상태였습니다(17편 양화 제1장). 물론 양호가 실권한 뒤를 내다본 포석일 가능성이 더 큽니다만. 그러다 양호의 천하가 1년여 만에 종식되자 노나라 동쪽에 독자적 근거지를 둔 공산불요가 공자와 손을 잡고자 한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양호와 공산불요가 공자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한 이유에는 공자가 거느린 제자를 자신의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계산이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들의 수장인 자로(중유)가 반대하고 나선 겁니다. 아마도 반(反) 삼환 세력의 넘버 1 격이었던 양호도 아니고 넘버 2밖에 안 되는 공산불요의 아래로 들어간다는 것이 마뜩치 않아서였을 겁니다. 하지만 공자는 양호보다 공산불요를 더 높이 평가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원전 505년 계손씨 6대 종주로 상경의 지위에 있던 계평자(계손의여)가 죽었을 때 양호는 제후에 준하는 성대한 장례를 치르려 하는데 공산불요가 이에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공산불요는 반란이 실패한 이후 제나라를 거쳐 남방의 오나라로 망명하는데 오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하는 것에 반대했고 결국 그 길잡이가 됐을 때도 일부러 길을 돌아가 노나라에게 시간을 벌어줄 정도로 의리가 있는 사내였습니다. 반면 양호는 제나라와 조나라 등의 망명지에서도 인근 백성을 괴롭혀 외모가 비슷한 공자가 곤욕을 치르게 되는 빌미를 제공합니다.
공자는 양호와 공산불요에게 잠시 경도됐을지언정 결국 반란의 수괴가 된 그들과 손을 잡지는 않았습니다. “정치의 본질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政者正也)”이라 주창했던 공자가 삼환 정치를 폐지하려 했던 것은 소수의 가문이 주권을 농단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습니다. 반면 양호와 공산불요는 삼환을 제거하되 자신들이 그 대체자가 되려 한다는 것을 공자도 감지하게 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하지만 거기엔 권력정치의 막후 게임이란 또 다른 이유도 숨어 있습니다.
삼환 세력도 공자와 그 제자들에게 눈독을 들이게 된 것입니다. 양호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양호와 공산불요의 역할을 대체해줄 새로운 사인(士人) 집단이 필요해졌는데 공자학단 만큼 매력적인 보완 대체재는 찾기 힘들었을 겁니다. 그래서 계평자의 적극적 구애가 이어지자 공자는 노정공 직속 신하가 되고 자로가 양호의 역할(계손씨의 가재), 자고(고시)가 공산불요의 역할(비읍의 읍재)을 대신하게 됩니다.
공자는 맏제자인 자로가 너무 직선적이고 무모하다고 타이르곤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무적 감각이 뛰어난 제자를 꼽을 때 계환자(계손비)의 아들인 계강자 시절 그 가재가 된 염유(염구‧염경과 염옹의 배다른 동생) 다음으로 자로를 언급할 정도로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 이유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공자가 양호와 공산불요에 경도됐을 때 자로는 조금만 더 기다리면 공자에게 더 좋은 기회가 올 것임을 내다본 것입니다. 뒷골목 건달 출신인 자로가 정치를 책으로 배운 공자보다 본능적으로 정치판 게임의 법칙을 잘 읽어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그렇게 정무감각이 뛰어났던 자로는 왜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 공자를 계속 스승으로 섬겼을까요? 자로는 권력게임엔 강할지언정 그 나라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 하는 비전과 정치개혁의 소프트웨어가 공자에 비해 턱없이 부족함을 절감했기 때문 아니었을까요? 자로는 양호와 공산불요의 역할은 대신할 수 있을지언정 제나라의 관중이나 안영, 정나라의 자산과 같은 명재상의 반열에 오를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겁니다.
공자의 그런 진가를 보여주는 것이 이 장의 마지막 구절입니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좀 더 기다리라는 자로의 질책을 수긍하면서도 “나를 기용하는 자가 있으면 그 나라를 동주(東周)로 만들어 줄텐데!”라고 말하는 대목입니다. 역사학적으로 동주는 보통 주나라가 수도를 호경(현재의 시안)에서 동쪽의 낙읍(지금의 뤄양)으로 옮긴 기원전 771년부터 새로운 통일왕조로서 진나라가 출범하는 기원전 221년까지를 말합니다. 춘추시대(기원전 771년~기원전 403년)와 전국시대(기원전 403년~기원전 221년)를 포괄하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동주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동주는 주문왕과 주무왕 그리고 주공의 영화(榮華)를 간직한 새로운 동방의 주나라를 뜻한다고 봐야합니다. 공산불요의 근거지로 삼은 비읍이 노나라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단 더 포괄적 의미로 동주의 동쪽 지역에서 옛 주나라 초창기에 필적할 만큼 문물과 제도를 발전시킬 자신이 있다는 뜻으로 봐야 할 겁니다. 이야말로 자로가 공자에게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게 만든 진정한 경쟁력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