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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Nov 19. 2020

누가 자유를 말하는가?

우민일기(2020년 11월 18일)


유시민과 진중권은 모두 좌파 아니었나? 그런데 이들이 왜 갑자기 우파 사상인 자유주의를 놓고 논쟁을 하는 걸까? 한국사회가 진정한 자유주의에 도달하지 못했음을 순순히 인정하는 것이며 좌파 연하던 자신들의 주장이 설익은 것이었음을 간증하는 것 아닐까.  


본디 우파는 자유를 중시하고 좌파는 평등을 중시한다. 한국의 우파에게 자유는 반공의 동의어에 가깝다. 공산화되지 않기 위한 자유만이 자유였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 '우파=자유주의'라는 공식에는 이런 생략과 왜곡이 존재한다. 세상의 어떤 자유주의자가 국가보안법과 휴대전화 잠금해제 법안 같은 걸 지지하겠는가.


의심할 나위 없이 자유주의는 왕과 귀족에 저항해 자신들의 지분을 확보하려는 부르주아의 사상으로 배태됐다. 계몽주의와 짝을 이룬 자유주의는 왕정과 과두정을 넘어 민주정을 쟁취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면 자유주의는 용도 폐기됐어야 하지 않을까? 왜 여태껏 존재하는 거지?


자유주의가 부르주아만의 자유가 아니라 인류의 보편적 자유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보편적 자유의 획득을 위해 평등이 그 짝이 돼야 함을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그 최고의  사상가가 바로 자유의 보편성을 논한 독일의 엠마뉴엘 칸트, 영국의 존 스튜어트 밀 그리고 미국에 건너가 존 롤스에게서 꽃을 피운 이유다.


우민이 보기에 칸트와 밀, 롤스의 자유주의는 이렇게 요약된다. "이 세상에 자유롭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존재한다면 그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나 자신의 자유를 유보하거나 양보하라."  


이렇게 자유주의의 극치는 유럽 사회민주주의와 만나게 된다. 그럼 자유주의와 사민주의의 차이는 없는 걸까? 우민 생각에는 그 출발점이 다르다. 자유주의는 사회 구성원의 자유가 최우선이다. 거기엔 사유재산권과 사생활 보호권도 포함된다. 다만 타인의 보편적 자유를 위해, 곧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 권리의 일부 또는 전부를 포기하는 것은 그 자신의 자유로운 선택에 맡긴다. 개체 발생의 관점에서 봤을 때 자유를 거쳐 평등을 지향해 나가는 것이다.


이와 달리 사민주의는 모든 사회 구성원을 출발선상부터 평등하게 만드는 구조적 제도적 장치 마련에 주력한다. 아예 처음부터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거다. 그러면 자유는 저절로 확보된다는 생각이다. 개체 발생의 관점에서 보면 보편적 평등의 확보를 통해 개별적 자유가 부수된다는 것이다.


우민은 평등 없이는 자유가 완성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다만 자유를 거쳐 평등으로 나가는 개체 발생을 지지한다. 모두에게 평등한 사회라는 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으며 존재하더라도 자칫 잘못하면 개인의 자유의사와 상관없이 그들을 억압하게 되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처 공자 예수 소크라테스와 같은 성현의 가르침이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는 것이 우민의 생각이다. 어린 시절부터 아이들에게 "네가 고민하는 것을 이미 성현이 다 해명해 놓으셨다"며 '답정너' 식 교육을 강요하는 것이 오히려 성현의 가르침에 공명하고 실천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것이다.


성현의 가르침은 그 스스로 빛을 발하는 햇빛보다는 누군가의 간절한 응시를 받아 빛을 반사하는 달빛에 가깝다. 배우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과 성현의 가르침이 공명했을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런 과정이 생략된 채 교사나 성직자의 개인적 체험에 입각한 성현의 말씀은 이미 죽은 가르침이다. 


그를 위해선 먼저 성현과 한판 대결을 펼쳐야 한다. "당신이 그렇게 잘났어? 그런 내 질문에 한번 답을 해보시지?"하고 정면대결을 펼쳐야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라"고 한 선승 임제의 일갈이 말하는 것도 이것이다. 그렇게 계급장 다 뗴고 맞짱을 뜬 뒤 그 가르침에 승복하게 됐을 때 비로소 스스로의 자유를 반납하고 복종을 선택하는 것이다.


평등을 향하는 길도 마찬가지다. 태어날 때부터 평등이 주어진다면 누가 그것의 귀함을 알겠는가. 자유의 귀함을 먼저 깨닫고 그것을 타인과 공유해야 그 자유가 완성된다는 것을 스스로 깨쳐야 한다. 그 깨달음에 먼저 도달한 사람도 후생이 같은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 기다려주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걸 무시하고 무조건 자유가 최고다, 평등이 최고다를 경쟁하듯 떠들고 가르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인내와 관용이 없는 교육은 모두 가짜일 뿐이라고 우민은 생각한다. 찐좌파는 이에 대해 또 뭐라 할까?^^




 #우민은 제멋대로 지어 본 제 별호입니다. 제 본명이 한자로 '현명한 재상'이란 거창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그저 '또 하나의 백성(又民)'일 뿐이며 '어리석은 백성(愚民)'이자 '근심하는 백성(憂民)'에 불과하다는 뜻을 담아 지어 봤습니다. '우민일기'는 제 글이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 '맨스플레인'이 많다는 생각에 제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하려는 글쓰기 시도입니다. 제가 결론을 끌어내기보다는 여러분의 참여를 끌어내는 질문을 던지는데 더 치중하려고 합니다. 많은 응답과 질정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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