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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Nov 17. 2020

'극일'말고 '우일'해요

우민일기(2020년 11월 17일)

극일(克日)이란 말이 있다. 친일-반일 논란에 대한 일종의 변증법적 대안으로 아예 일본을 극복해버리자는 표현이다. 우민 역시 친일이냐 반일이냐는 이분법적 갈등을 볼 때마다 자연스럽게 입에 올리던 말이었다.


그러다 그 발상이나 표현 자체 역시 일본에서 연원했음을 알고 기겁했다. 바로 '근대의 초극'이란 개념이다.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벌어지고 1년 뒤 일본 잡지 '문학계'에서 시대적 화두로 던진 이 말은 당시 일본에서 크게 유행했다. 여기서 근대란 곧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대적해야 했던 서구를 말한다.  


일본은 근대화를 선도했던 서구를 따라잡기 급급했다. 하지만 그렇게 쫓아가기만 하다 보면 서구를 따라잡을 수도 없고, 서구적 근대가 초래한 여러 모순도 극복할 수 없게 된다. 그러니 아예 서구를 초월하고 극복해버려야 한다는 주장이다.


극일이란 개념의 원형이 '근대의 초극'에 있는 셈이다. 서구(근대)를 일본으로 바꾸면 고스란히 극일이란 개념과 포개진다. 둘 다 지극한 열등감의 산물이란 점에서 같다. 사람의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 그렇게 따지면 변증법을 국가론으로 발전시킨 헤겔이 원조 아니냐는 반론을 펼칠 수 있겠다.


우민의 생각은 다르다. 단순히 개념만 유사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근대의 초극이란 개념의 귀착점이 무엇이었던가? 일본을 자멸로 끌고 간 군국주의였다. 서구 근대 열강을 열심히 추종하다가 한계에 도달하자 '극복'과 '초월'이라는 동양적 정신승리의 용어를 끌고 온 결과물이 태평양전쟁이고 열도옥쇄론이었다.


우민은 이런 동양적 정신승리의 사례를 북한의 주체사상에서도 발견한다.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한다. 그 모델은 소련과 중국이다. 그런데 자체 사회주의 사상이라는 주체사상은 마르크시즘에 기초한다면서 유물론과 유물사관이라는 양대 기둥을 뽑아버린다.


첫째 마르크시즘은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하여 물질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물질 결정론을 주창했다. 반면 주체사상은 거꾸로 의식을 지닌 인간이 만물의 주인이라는 의식 결정론을 주창하고 나섰다. 둘째로 마르크시즘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에 의해 역사가 변증법적으로 변화 발전하나는 유물사관을 주창했다. 반면 주체사상은 "마르크시즘이 민중이 세계의 주인으로 등장하지 못했던 이전 시대를 반영한 철학이라면 주체사상은 민중이 세계의 주인으로 등장한 이후의 사상”이라는 돌연변이에 가까운 인식론적 단절을 감행한다.


도통 앞뒤가 안 맞는 궤변이다. 우민이 보기에 주체사상의 이런 논리 비약은 마르크스가 깔아놓은 역사의 레일 위를 달리던 기차가 갑자기 공중 부양해 허공의 레일 위로 달리는 것이나 진배없다. 일본 만화 '은하철도 999'를 연상시키는 SF적 이탈일 뿐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만화에 영감을 제공한 마루야마 겐지의 '은하철도의 밤' 이란 동화 역시 1930년대 일본에서 발표된 것이었다.


물론 마루야마 겐지는 천황주의자나 제국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당시 일본 사회를 지배하던 2가지 감정의 혼종으로 탄생한 작품 아니었을까? 바로 당시 군국주의로 치닫는 일본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서구적 근대화가 가져온 부작용을 초극하고 싶다는 열망이다. 그것이 보편적 인류의 동경으로 표현된 작품이 '은하철도의 밤'이라면 군국주의적 불안에 영혼까지 털려버린 것이 '근대의 초극'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초월과 극복을 내거는 주체가 대부분 전체주의적 정부라는 것이다. 군국주의쟉 천황제를 채택했던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주체사상을 김일성 유일사상이라 주장하는 북한, 시진핑의 중국, 푸틴의 러시아 같은 전체주의 독재국가들의 단골 레퍼토리다.


당대 최고의 진보적 자유론자였던 헤겔이 전체주의의 사상적 대부로 오인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관념론과 경험론의 변증법적 지양을 주창한 것이 전통과 근대의 변증법적 지양의 결과물로서 '우리식 사회주의' 운운하는 것들로 포장하는데 그럴듯하기 때문이다.


서유럽 국가가 성취한 근대 물질문명에 대한 동경을 부채질하면서 그로 인해 초래된 비루하고 고단한 현실에 대한 마취제 효과까지 겸비한 마약. 그게 바로 '초월'이니 '극복'이니 아니면 양자를 겸비한 '초극' 같은 용어로 포장된 전체주의의 비장의 무기였다. 주체사상은 군국주의 일본의 천황주의에 포섭된 변종이란 점에서 북한은 남한보다 사상적으로 더 악질적인 친일 국가다.


따라서 제국주의 일본의 전철을 고스란히 밟아가며 친일-반일-극일의 도식을 펼칠 이유가 없다. 과거 일본이 한국인에게 동경과 염오의 감정을 동시에 일으키게 한 것은 사실이다. 또한 역할 모델과 반면교사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과거는 과거일 뿐. 이제 일본은 한국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나라도 아니고 죽도록 싫어해야 할 국가도 아니다. 선진국 클럽에 가입하기 위해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도 아니다. 다만 가까이 있기에  보편적 인류애와 우애를 먼저 나눠가야 할 국가로 새롭게 자리매김해야 한다. 한국보다 잘하는 게 있으면 본받고 못하는 게 있으면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차라리 우일(友日)이란 표현을 썼으면 어떨까 한다.


솔직히 우민은 일본이란 나라에 비해 한국이 경제적으론 엇비슷하고 정치나 사회적으로 조금 앞서 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베의 집권 이후 일본 정치가 계속 뒷걸음치는 것이 안쓰럽고 안타깝다는 생각을 한다. 일본이 한국에게 추월당했다는 열등감에 열폭하는 것도 살짝 이해가 되고 한국이 좀 더 어른스럽게 접근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한다.


하지만 여전히 일본이 앞서가는 부분도 많다. 비혼모가 되고 싶은데 한국은 불가능해 일본으로 건너가 아기를 낳았다는 사유리의 뉴스를 접하면서 무릎을 친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아, 저렇게 한국을 좋아하는 사유리가 한국에선 할 수 없어 일본에 가서야 만 이룰 수 있는 꿈이 있다니. 사유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한국 여성이 있다면 얼마나 일본을 부러워할까. 이웃의 나쁜 점은 대놓고 핀잔 주고 면박 주는 건 자제하자. 대신 좋은 점은 바로 따라서 배우자. 그게 진짜 우일 아닐까.


 #우민은 제멋대로 지어 본 제 별호입니다. 제 본명이 한자로 '현명한 재상'이란 거창한 뜻을 담고 있습니다. 그래서 반대로 그저 '또 하나의 백성(又民)'일 뿐이며 '어리석은 백성(愚民)'이자 '근심하는 백성(憂民)'에 불과하다는 뜻을 담아 지어 봤습니다. '우민일기'는 제 글이 전지적 작가 시점에 가까운 '맨스플레인'이 많다는 생각에 제 자신을 3인칭으로 객관화하려는 글쓰기 시도입니다. 제가 결론을 끌어내기보다는 여러분의 참여를 끌어내는 질문을 던지는데 더 치중하려고 합니다. 많은 응답과 질정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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