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편 양화(陽貨) 제1장
양화(양호)가 공자를 만나고자 했으나 공자가 만나주지 않자 돼지를 선물로 보냈다. 공자는 일부러 양화가 없는 틈을 타서 답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주치고 말았다.
양화가 공자에게 말했다. “오시오, 그대와 할 이야기가 있소.” 그리고 말하기를 “귀한 보배를 품고서도 나라를 혼돈 속에 방치하는 것을 어질다고 할 수 있소?”
“할 수 없습니다.”
“정치를 하고자 하면서도 자꾸만 때를 놓치는 것을 지혜롭다고 할 수 있소?”
“할 수 없습니다.”
“해와 달은 가는 것이니 세월은 우리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알겠소, 내 장차 벼슬을 하겠소.”
陽貨欲見孔子, 孔子不見, 歸孔子豚.
양화욕견공자 공자불견 귀공자돈
孔子時其亡也而往拜之, 遇諸塗.
공자시기무야이왕배지 우저도
謂孔子曰: “來 予與爾言.” 曰: “懷其寶而迷其邦 可謂仁乎?”
위공자왈 래 여위이언 왈 회기보이미기방 가위인호
曰: “不可.”
왈 불가
“好從事而亟失時, 可謂知乎?”
호종사이기실시 가위지호
曰: “不可.”
왈 불가
“日月逝矣, 歲不我與.”
일월서의 세불아여
孔子曰: “諾. 吾將仕矣.”
공자왈 낙 오장사의
전체 20편으로 이뤄진 ‘논어’는 편마다 주제가 따로 있질 않습니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유형이 비슷한 장들을 엮었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요소가 많습니다. 19편 자장의 경우는 공자의 제자들 발언 중심으로 엮여 있습니다. 18편은 일민(逸民)이나 은자(隱者)로 분류될만한 인물들에 대한 일화 중심으로 엮여 있습니다. 그럼 17편은 어떻게 엮여 있다고 할까요? 정치를 맡기겠다는 미끼로 공자를 시험에 들게 했던 양화(양호), 공산불요, 필힐 같은 난신적자와 일화 중심으로 엮여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제19장에 나오듯 붉은색을 탐하는 자주색이요, 아악(雅樂)을 넘보는 정악(鄭樂)이요, 말재주로 나라를 뒤집으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중에서 가장 존재감이 컸던 인물이 ‘논어’에선 양화(陽貨)로 표기된 양호(陽虎)입니다. 양화라는 호칭은 그를 가신으로 뒀던 계손씨 가문에서 사람이 아니라 물건으로 간주하겠다 하여 중국어로 ‘호랑이 호(虎)’와 발음이 비슷한 ‘물품 화(貨)’를 썼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앞서 설명했듯이 양호는 기원전 505년 무력을 동원해 계손씨의 가재(家宰)였던 중량회(仲梁懷)를 죽이고 7대 종주이자 노나라의 실권자였던 계환자를 잡아 가둔 뒤 자신의 뜻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맹약을 받아내는 쿠데타를 감행한 인물입니다. 기원전 693년경부터 180년 동안 계손씨, 숙손씨, 맹손씨 세 귀족 가문이 노나라 국정을 좌지우지해왔던 삼환정치를 거의 끝장낼 뻔했던 풍운아였습니다. 하지만 양호의 쿠데타는 맹손씨와 숙손씨 가문의 협공으로 만 3년을 채우지 못하고 기원전 502년 수포로 돌아가고 맙니다.
양호의 목표는 공자와 같은 삼환정치의 척결이었습니다. 공자는 그 권력을 노나라 제후에게 돌려주고자 했으나 양호는 스스로 그 권좌를 차지하려고 했다는 차이가 존재합니다. 공자의 처지에선 계환자나 양호나 오십보백보였던 셈입니다. 아니, 충효를 강조한 후대 유가의 관점에서 보면 양호의 죄질이 훨씬 더 나쁩니다. 충성을 맹세했던 계환자를 제거하고 그 자리를 탐낸 배신자이자 난신적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무수한 논어 주석서에선 공자를 그럴듯한 말로 유혹하는 양호를 광야에서 예수를 유혹했던 사탄이나 되는 양 취급하기 일쑤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런 결론은 과도한 도덕론이자 손쉬운 결과론에 지나지 않습니다. 당시 공자의 처지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양호는 로버트 프로스트의 표현처럼 ‘가지 않은 길’과 비슷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공자가 택하지 않은 길,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걸어간 그 길은 힘의 논리로 최고 권좌를 차지하고 자신의 신념에 입각한 정치를 펼칠 수 있다고 믿는 양호 같은 사내들로 득실거리는 길입니다. 상앙, 오자서, 오왕 부차, 월왕 구천, 여불위, 진시황 영정… 명단이 끝없이 길게 이어지는 지름길입니다.
당시 공자의 나이는 불혹과 지천명 사이에 위치했으니 양호가 걸어간 길에 미혹되지 않았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인간인 이상 그 길의 끝이 어디 일지를 오랫동안 응시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양호가 노나라 전권을 장악하고 공자에게 관직을 제안할 무렵엔 그 길 너머에서 이상야릇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느껴졌을 법도 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가야 할 정도는 따로 있다고 믿었기에 양호와 삼환 사이에 끼어서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드는 것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런 차에 양호가 그런 공자를 꾀기 위한 꾀를 냈습니다. 공자가 집을 비운 사이 돼지를 하사한 것입니다. 당시 예법으론 대부가 선물을 하사할 때 직접 받고 사례하지 못한 경우에는 반드시 그 대부의 집에 찾아가 답례를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공자도 양호가 집을 비운 틈을 노려 답례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양호가 그걸 놓칠 리가 없습니다. 아마도 공자가 돌아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을 그린 것입니다.
많은 논어 주석서들은 양호의 현란한 말솜씨에 공자가 어쩔 수 없이 벼슬길에 나설 것을 약속했다가 양호의 사람됨을 알기에 파기했다고 설명합니다.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이 장의 행간을 읽어보면 공자는 결코 약속을 파기한 것이 아닙니다. ‘장차 내 벼슬을 하겠소’라는 약속을 꼭 양호가 집권하는 동안으로 단정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에서 양호가 구사하는 어휘를 보면 그 역시 상당한 지식인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공자가 어질고 현명한 정치를 주창해온 것을 알고 공자가 출사 하지 않는 것이 그에 어긋나는 것 아니냐고 정곡을 찌르고 들어온 것입니다. 또 공자가 시를 좋아함을 알고 보(寶)와 방(邦), 사(事)와 시(詩)의 운을 맞추는가 하면 해와 달과 세월을 병치시키는 문학성까지 유감없이 과시했습니다. 교양과 재주가 뛰어난 사람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공자와 양호 둘의 대화만 보면 공자가 수세에 몰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하지만 그 만남을 통해 공자는 아지랑이 가득하던 ‘가지 않은 길’의 실체를 간파했습니다. 양호는 구제불능의 나르시시스트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재능과 재주에 취해 주변을 챙기고 둘러볼 줄 모르는 사람. 한자문화권에선 그런 사람을 재승박덕(才勝薄德)하다고 표현합니다.
그렇기에 양호 아래서 벼슬을 할 생각이 없음에도 양호의 천하가 오래가지 않을 것임을 내다보고 ‘포스트 양호 시대’가 도래했을 때 꼭 출사해 자신의 웅지를 펼치겠다는 결심을 대내외에 천명한 것입니다. 다만 굳이 양호와 척을 질 필요가 없었기에 양호의 요청에 화답하는 모양새를 취한 척한 것뿐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양호가 쫓겨나자마자 바로 벼슬길에 나섰으니 공자는 결코 허언을 한 것이 아닌 것입니다. 논어 17편의 첫 장에 이 글이 실려 있는 진자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