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펭소아 Apr 12. 2021

자유주의자 공자

17편 양화(陽貨) 제2장

  공자가 말했다. “사람의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습관에 의해서 서로 달라진다.”

     

  子曰: “性相近也, 習相違也.”

  자왈    성상근야   습상원야          



    ‘논어’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글귀 중 하나입니다. 공자의 후예는 여기서 언급되는 성(性)을 놓고 성선(맹자)이니 성악(순자)이니 ‘성즉리(性卽理‧주자)’이니 다양한 이론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논어에서 성이 언급된 것은 2번뿐입니다. 그나마 공자가 직접 성을 언급한 것은 여기가 유일합니다. 다른 하나(5편 공야장 제13장)는 ‘공자가 성과 천도(天道)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좀처럼 들을 수 없었다’는 자공의 증언입니다. 따라서 후대의 성 개념을 갖고 거꾸로 공자가 말한 성을 재단해선 안 됩니다.  

   

  여기서 성은 습의 상대적 개념으로만 이해해야 합니다. 성은 타고난 본성으로 영어로 말하면 nature입니다. 습(習)은 살아가면서 터득한 것으로 영어로 말하면 nurture입니다. 타고난 본바탕은 서로 비슷비슷한데 사람마다 차이가 생기는 것은 크면서 어떻게 훈육받고 그걸 내면화했느냐에 의해 갈린다는 소리입니다.  

   

  20세기 들어 자본주의는 nature를 강조했고 사회주의는 nurture를 강조했습니다. nature의 차이로 사회적 차별이 발생하기에 자연스럽다는 이념과 nurture만 동일하다면 누구나 평등할 수 있다는 이념의 차이가 낳은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회주의 중국에선 공자의 이 발언을 대서특필했습니다. 습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니 nurture의 편에 선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죠.  

    

  이 분야에 대한 유전학과 행동심리학 연구결과를 보면 nature의 비중이 크지만 nurture의 역할 역시 무시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nature 49.5% 대 nurture 48.5%로 그 비중을 나눠 봅니다. 그럼 나머지 2%는 뭐냐고요? 저는 그것을 signature로 쓰고, 개인의 주체적 선택, 곧 자유의지로 읽습니다. 본성의 힘이 가장 크긴 하지만 어떻게 교육받느냐에 따라 본성의 좋은 점은 최대화되고 나쁜 점은 최소화될 수 있습니다. 그 비율은 낮지만 결정적 차이를 낳는 것은 본인의 자유의지입니다. 피동적으로 훈육받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선택에 의해 그걸 내면화할 때 운명을 넘어선 삶이 가능해집니다. 

    

  2500년 전 사람인 공자가 이런 세세한 내용까지 알 턱이 없습니다. 하지만 타고난 성(性)에서 벗어나 의미 있는 변화를 이루기 위해 습(習)의 중요성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렇다고 공자가 사회주의자여서 그렇다는 것은 후대의 착종에 불과합니다. 그가 말하는 습(習)에는 주어진 환경으로서 48.5%의 nurture와 함께 주체적으로 결단하고 실천에 옮기는 의지로서 2%의 signature가 포함돼 있다고 봐야 합니다.   

   

  다산 정약용이 “지극히 지혜로운 사람과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제3장과 ‘성상근습상원’의 제2장을 하나의 장으로 묶어야 된다고 한 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이상 누구나 바뀌고 변화해야 하는데 그것은 본성의 발현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 의지를 갖고 삶의 패턴을 바꿈으로 가능해진다는 하나의 메시지로 묶어야 한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운명이니 숙명이니 하는 것에 굴복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혈통에 의해 신분과 운명이 결정되는 것에 저항해 누구나 학문을 닦고 덕성을 키우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통치자(군자)가 될 수 있음을 역설했습니다. 또한 그 군자몽을 이루기 위해 약육강식이 난무하는 춘추시대에 인의와 예악을 강조하는 정치사상을 실천에 옮기고자 했습니다. 풍차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하는 돈키호테처럼 14년간 천하주유도 마다히지 않았습니다. 노나라에서 정무에 참여할 때나 원로 대접을 받을 때도 바른 정치를 펼치겠다는 목표에 부합하기 위해 끝까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큰 바보'로 생을 마쳤습니다. 그런 공자를 개인주의자 또는 사회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차라리 인간의 자유의지를 신뢰했던 자유주의자에 더 가깝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매거진의 이전글 공자는 보수주의자가 아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