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편 계씨(季氏) 제13장
진항이 공자의 아들인 백어(공리)에게 물었다. “스승님으로부터 특별한 말씀을 들은 게 있겠지요?”
백어가 말했다. “없었습니다. 한 번은 부친께서 홀로 서 계실 때 제가 뜰을 종종걸음으로 지나가자 ‘시를 공부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직 못했습니다’고 말씀드리자 부친께서는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할 게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물러나 시를 공부했습니다.
다른 날 부친께서 또 홀로 서 계시다가 제가 뜰을 종종걸음으로 지나가자 ‘예를 공부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아직 못했습니다’라고 말씀드리자 부친께서는 ‘예를 배우지 않으면 스스로 설 수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물러나 예를 공부했습니다. 제가 들은 것은 이 두 가지뿐입니다,”
진항은 돌아서 기뻐하며 말했다. “나는 하나를 물어 셋을 얻었다. 시에 대해 듣고, 예에 대해 듣고, 또 군자는 그 아들과도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을 들었다.”
陳亢問於伯魚曰: “子亦有異聞乎?”
진항문어백어왈 자역유이문호
對曰: “未也. 嘗獨立, 鯉趨而過庭. 曰: ‘學詩乎?’ 對曰: ‘未也.’ ‘不學詩, 無以言.’ 鯉退而學詩.
대왈 미야 상독립 리추이과정 왈 학시호 대왈 미야 불학시 무이언 리퇴이학시
他日 又獨立, 鯉趨而過庭. 曰: ‘學禮乎?’ 對曰: ‘未也.’ ‘不學禮, 無以立.’ 鯉退而學禮. 聞斯二者.”
타일 우독립 리추이과정 왈 학례호 대왈 미야 불학례 무이립 이퇴이학례 문사이자
陳亢退而喜曰: “問一得三, 聞詩, 聞禮, 又聞君子之遠其子也.”
진항퇴이희왈 문일득삼 문시 문례 우문군자지원기자야
진항(陳亢)은 19편 자장 25장에 등장한 진자금(陳子禽)과 동일인입니다. 자금(子禽)은 성인식을 치르고 부여받는 이름인 자(字)입니다. 진 씨 성을 쓰는 것으로 봐서는 진나라 귀족의 후손일 가능성이 큽니다. 위진(魏晉)시대 편집된 ‘공자가어’에는 공자보다 41세 어린 자(子) 계열의 제자로 소개돼 있습니다. 자공의 제자라는 설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공에게 “중니가 어찌 당신보다 현명하겠습니까?”(19편 자장 25장)라고 발언한 것으로 봐서는 공문의 제자일 수 없습니다. 자공과 가까이 지내며 공문에 대해 궁금증이 많은 노나라의 동료 대부 정도로 봐야할 것입니다.
진항은 ‘논어’에 모두 3차례 등장해 질문을 던집니다. 하나같이 공자학단 사정에 정통한 내부자의 질문이 아닙니다. 공자에 대한 호기심을 해소하려는 취재기자의 질문에 가깝습니다. 총명하기로 소문난 자공에게 “과연 공자가 당신보다 현명한가?”라는 질문을 했듯이 공자의 외아들인 공리(백어)에게는 가문의 특별한 교육방식이 있지 않냐고 캐묻습니다.
공리의 답은 “뜰 앞을 지날 때 거기 서계시던 아버지가 무심하게 던지신 두 마디 가르침만 있었다”라는 것입니다. 첫째는 17편 양화 제10장에도 나오듯 시(詩)에 대한 공부를 독려받았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예(禮)에 대한 공부의 필요성에 대해 들었다는 것입니다. 각각 “시를 공부하지 않으면 더불어 말할 게 없다”는 것과 “예를 공부하지 않으면 독립된 인격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서 ‘논어’의 3가지 테마가 지명(知命), 지례(知禮), 지언(知言)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공자가 아들 교육을 위해 가장 핵심적인 것만 물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언을 위해 시를 공부하라 했고 지례를 위해 예를 공부하라 한 것입니다. 그럼 지명에 대해선 왜 언급하지 않았을까요? 공자의 기준으로 지명하려면 나이가 오십은 되어야 하는데 공리는 오십 되던 해에 아버지보다 앞서 숨을 거뒀습니다. 아마도 명을 알기 위해선 명리학 서적인 역경 또는 역사서인 서경을 공부하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거기까지 진도를 나갈 여력이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 구절의 교훈을 두고 공자가 다른 제자와 자식을 차별하지 않고 똑같이 가르쳤다는 해석과 이로부터 군자는 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않고 별도의 스승을 뒀다는 해석이 등장합니다. 이는 달을 가르치는데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보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공자가 자신의 외아들에게 꼭 배우라고 강조한 것이 시(시경)와 예(예기)인만큼 공자의 군자학에서 그 둘이 기둥에 해당한다는 말입니다. 또 공자학단의 텍스트 중에서 시경과 예기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의미합니다.
질문자인 진항이 공리의 답을 듣고 제일 먼저 깨달은 두 가지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군자라면 자식농사 잘 짓겠다고 유난을 떨어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공자도 사람인 이상 자식, 그것도 외아들에 대한 애착심이 왜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을 함부로 드러낼 경우 오히려 자식의 교육을 망칠 수 있었기에 다른 제자와 차별을 두지 않기 위해 애를 쓴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별도의 스승을 붙여줄 정도로 바지바람을 일으켰을 리도 없습니다. 부자간 대화를 들어보면 공리가 시와 예를 공부한 것은 별도의 스승에게서 배운 게 아니라 홀로 공부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공리의 경우엔 학문적 재능이 없었음을 누구보다 공자가 잘 알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비의 기대가 너무 높으면 아들이 주눅들까 봐 일부러 공부의 진도와 수준을 챙겨보지 않은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아들이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안타까워 자신이 창학한 군자학의 핵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팁만 핀포인트로 일깨워준 것입니다.
이러한 자식교육 방식을 제대로 꿰고 있는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둘째 아들 박종채입니다. 그는 아버지 연암에 대한 전기를 펴내면서 ‘논어’의 이 구절에 반복 등장한 ‘과정(過庭)’을 따서 책 제목을 ‘과정록(過庭錄)’으로 삼았습니다. 거기엔 집안의 뜨락을 오가며 보게 된 아버지의 모습 그 자체가 자식에게 큰 교육이 된다는 뜻이 함의돼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리는 따로 아버지에게 뭔가를 배울 필요가 없었습니다. 곁에서 늘 지켜보며 따르고 싶었던 아버지가 곧 ‘만고의 스승’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간과한 채 아버지가 직접 가르치기 보다는 별도의 스승을 붙여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