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편 계씨(季氏) 제12, 11장
공자가 말했다. “좋은 일을 보면 쫓듯이 덤비고, 좋잖은 일을 보면 끊는 물 가까이 갔을 때처럼 피한다. 내 그런 사람을 보았고, 그런 얘기를 들었다. 숨어 지내면서도 뜻한 바를 추구하고, 의로움을 행하여 그 도를 이룬다. 내 그런 얘기는 들었지만 아직 그런 사람을 본 적은 없다. 제경공은 4천 필의 말을 소유할 정도로 부와 권력을 자랑했지만 죽었을 때 그의 덕을 칭송하는 백성이 없었다. 반면 백이‧숙제는 수양산 아래서 굶어 죽었지만 백성은 지금도 그들을 칭송한다. 이것이 그를 말함일까?”
孔子曰: “見善如不及, 見不善如探湯. 吾見其人矣, 吾聞其語矣.
공자왈 견선여불급 견불선여탐탕 오견기인의 오문기어의
隱居以求其志, 行義以達其道. 吾聞其語矣, 未見其人也.
은거이구기지 행의이달기도 오문기어의 미견기인야
齊景公有馬千駟, 死之日民無德而稱焉, 伯夷叔齊餓于首陽之下, 民到于今稱之. 其斯之謂與?
제경공유마천사 사지일민무덕이칭언 백이숙제아우수양지하 민도우금칭지 기사지위여
‘논어’의 원전에는 12장과 11장으로 나뉘어 있는 것을 다산 정약용의 해석을 쫓아 하나로 합쳤습니다. 12장은 ‘제경공유마천사(齊景公有馬千駟)’로 시작하는 구절입니다. 12장에는 공자왈이 빠져 있으며 맨 마지막에 ‘이것이 그를 말함일까?'라는 구절에 대응하는 표현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래서 12편 ‘안연’ 10장 마지막에 들어간 ‘성부이부 역지이이(誠不以富 亦祗以異)’라는 구절이 ‘기사지위여(其斯之謂與)’ 바로 앞에 삽입돼야 한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제경공의 사례와 백이‧숙제의 사례를 비교하면서 "진실로 부유해서가 아니라 다만 남달라서"라는 표현이 들어가야 자연스럽다는 정자(정이)와 주자(주희)의 관점을 따른 겁니다.
‘성부이부 역지이이’는 시경에 수록된 ‘아행기야(我行其野)’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원문에선 성이 成으로 표기됨). ‘아행기야’는 남편이 바람이 나서 시집왔을 때 들뜬 마음으로 지나온 그 들판을 다시 지나서 본가로 돌아가는 아낙네의 상심이 담긴 작품입니다. 여기서 誠과 祗는 부사로 각각 '진실로'와 '단지'를 뜻합니다. 그 마지막 구절의 의미는 ‘진실로 치부를 위해 돈 많은 여인과 바람난 것이 아니라 단지 색다른 여인과 놀아나기 위해서’라고 꼬집는 것입니다.
다산은 시경의 시에 정통했던 공자가 제경공을 돈 많은 여인네, 백이‧숙제를 색다른 여인네로 비견했을 리 만무하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앞의 11장과 12장을 합치면 ‘기사지위여’가 가리키는 내용이 뚜렷해진다고 설파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도 그게 훨씬 더 자연스럽습니다.
11장의 내용을 압축하면 이렇습니다. “좋은 일의 실천에 앞장서고 나쁜 일을 멀리하려는 경우는 많이 보고 들어봤지만 남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면서 그 뜻을 꺾지 않고 의리와 도리를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본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어 12장의 내용은 “제경공은 천자보다 더한 권세를 누렸지만 죽었을 때 그 덕을 칭송하는 사람이 없었으나 숨어살다 굶어 죽은 백이‧숙제는 500년이 지난 지금도 그 덕이 칭송받으니 이것이 그를 말함일까?”입니다. 여기서 그는 '남의 눈을 피해 숨어 지내면서 그 뜻을 꺾지 않고 의롭고 도리에 맞게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받는 게 됩니다.
대부분의 주석서는 과거 속 이야기로만 존재하는 백이‧숙제에 초점을 맞춥니다. 하지만 제게에는 그런 전설의 인물과 대척점에 선 인물로 그려진 제경공에 대한 비판의 텍스트로 읽힙니다. 제경공(강저구)은 백이‧숙제와 달리 공자가 들었을 뿐 아니라 보기도 한 동시대 인물입니다. 노나라와 이웃한 강대국의 제후로서 그 재위 기간이 58년이나 됐습니다. 공자가 다섯 살 무렵부터 환갑을 넘긴 나이까지 재위를 지켰습니다. 인덕이 부족했지만 재상 안영을 기용한 이후 제환공 시절에 버금간다고 할 만큼 국력을 신장시키긴 했습니다.
문제는 안영이 죽은 뒤 전씨 가문의 8대 종주인 전항(田恒‧원래 진나라 종실의 후손이라 진항‧陣恒으로도 부름. 사마천의 '사기'에는 한문제의 이름 유항‧劉恒을 피휘하려고 전상‧田常으로 등장)을 재상으로 기용하고 맙니다. 결국 전항은 제경공이 죽은 뒤 안영의 뒤를 이어 재상의 자리를 낚아챈 뒤 제나라 국정을 농단하며 멋대로 제후를 바꿔칩니다. 이후 대대로 전씨 가문이 제나라를 쥐락펴락하다가 결국 100년 뒤인 기원전 386년 제나라는 '강씨의 나라(姜齊)'에서 '전씨의 나라(田齊)'로 바뀌게 됩니다.
노나라 제후였던 노소공이 무력으로 삼환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계평자를 제거하려다 실패해 제나라로 망명할 당시 제후도 제경공이었습니다. 당시 삼십대였던 공자도 제나라로 자발적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난 적이 있습니다. 공자가 공직에 진출한 오십대 초반에 노나라와 제나라의 협공 회동의 의례를 주관하면서 제경공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논어’에는 공자가 제경공과 만나 대화한 내용이 두 차례 등장합니다. 12편 ‘안연’ 제11장과 18편 ‘미자’ 제3장입니다. 안연 편에선 제경공이 정치에 대해 묻자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운 것이다’라고 답했다는 유명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미자 편에선 제경공이 공자를 경(卿)에 준해 기용하려다 말자 공자가 떠나갔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안연 편의 대화는 협곡 회동 때 이뤄졌을 가능성이 큽니다. 반면 미자 편의 대화는 앞에서 살펴봤듯이 공자의 제나라 유학시절 때의 이야기밖에 될 수 없기에 후대의 착종 아니면 창작으로 짐작됩니다.
제경공이 숨진 것은 기원전 490년으로 공자의 천하 주유 8년째의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저 발언은 공자 나이 예순둘 이후의 것으로 봐야 합니다. 사(駟)는 고대의 전차 한 대를 끄는 4마리 말 한 세트를 뜻합니다. 따라서 천사(千駟)라 하면 4000 필의 말이 됩니다. ‘주례(周禮)’에 따르면 천자(왕)는 3456 필, 제후는 2592 필의 말을 기른다고 돼 있습니다. 4000 필의 말이면 천자보다도 500 필 넘는 말을 키웠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토록 오래 제위에 있었고 천자보다도 권세가 막강했지만 제경공을 끝으로 강씨의 제나라는 몰락하고 전씨의 제나라로 바뀌게 됩니다. 전씨의 나라가 되는 것은 공자 사후 93년 뒤의 일이기에 ‘논어’에 기록된 공자의 발언은 이를 예고라도 하는 듯이 들립니다.
백이와 숙제는 멸망한 은나라의 마지막 충신입니다. 은나라 제후 중 하나였던 주무왕이 폭군 주왕을 치는 역성혁명에 반대해 주나라가 주는 녹봉을 거부하고 수양산 기슭에서 나물을 캐먹다가 결국 굶어 죽었다는 전설적 존재입니다. 그런 백이‧숙제를 당대 제후 중에서 세력이 가장 컸던 제경공에 비견한 것입니다. 따라서 제나라 강씨 공실이 무너질 때 백이와 숙제 같은 충신이 나오지 않을 것임을 예견한 것과 같은 효과가 발생합니다.
여기서 발칙한 상상을 한번 해봅니다. 만일 12장의 별개의 장이라면 ‘기사지위여’ 앞에 들어가 있다가 삭제된 표현이 뭐였을까요? 공자의 가르침을 충효의 사상으로 포장한 후대의 유가 지식인이 꼭 감춰야 했을 발언 아니었을까요?
제가 공자가 되어 시경에서 한 구절을 고르라면 ‘탕(湯)’이란 시의 마지막 두 구절을 꼽았을 겁니다. ‘탕’은 은나라가 왜 멸망했는가를 주문왕의 입을 빌려 노래하는데 그 마지막 구절이 바로 ‘은감불원(殷鑑不遠)/ 재하우지세(在夏后之世)’입니다. ‘은나라의 거울은 멀리 있지 않으니/ (그 전대인) 하나라 시대에 있었네’라는 뜻입니다.
공자는 이웃한 강대국 제나라의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제경공 시절 제나라로 유학까지 다녀오며 그 장단점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습니다. 당시 제나라는 ‘노나라의 확장판’이 되어가고 있었으니 몇몇 귀족 가문이 권력을 장악하고 암투를 벌이다 경제권을 쥔 전씨 문중이 노나라의 계손씨 문중 같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재상인 안영조차 진(晉)나라 대부를 만났을 때 “제나라는 앞으로 전씨의 나라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할 정도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제경공은 노망한 탓인지 장성한 자식들을 놔두고 애첩이 낳은 어린아이(안유자)를 후계로 삼는 패착을 둠으로써 전씨 세상의 문을 열어주고 말았습니다.
노나라 재건을 위해 삼환 정치 척결을 절실하게 여겼던 공자의 눈에 이런 제나라는 곧 암울한 ‘노나라의 미래’나 다름없었을 것입니다. 천하 주유를 마치고 노나라고 귀국한 뒤 뒷방 늙은이로 물러나 있었던 공자가 죽기 2년 전인 기원전 481년 목욕재계까지 하고 노애공과 삼환을 찾아가 제나라를 토벌해야 한다고 상주한 이유도 같았습니다. 바로 그해 전항이 제경공의 손자인 제간공(강임)을 시해하고 제 맘대로 그 동생인 제평공(강오)으로 제후를 바꿔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공작의 이 지극한 마지막 상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은나라의 거울은 하나라 시대에 있다'는 구절을 통해 ‘제나라의 거울은 은나라 시대에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됩니다. 또한 당대로 시야를 좁히면 ‘노나라의 거울은 이웃인 제나라에 있다’로 변용할 수도 있습니다. 후대의 유자들에겐 이게 몹시 부담스러웠나 봅니다. 제경공은 안영이란 훌륭한 재상을 기용한 나름 나쁘지 않은 군주였는데 그를 폭군인 하나라 걸왕이나 은나라 주왕과 비견해버리면 남아날 군주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슬쩍 그를 지워버린 건 아닐까요? 그렇지 않았다면 공자는 만고의 충신이 아니라 훗날의 맹자를 능가할 정도로 동시대 군왕의 잘못을 매섭게 비판한 사상가 반열에 올랐을 텐데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