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펭소아 Apr 17. 2021

공자와 부처의 차이

16편 계씨(季氏) 제10장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아홉 가지를 생각한다. 볼 때는 밝음을, 들을 때는 맑음을, 얼굴빛은 온화함을, 태도는 공손함을, 말할 때는 충실함을, 일할 때는 정성스러움을, 의심스러울 때는 질문을, 화날 때는 후환을, 이득이 발생했을 때는 의로움을 생각한다.”     

  

  孔子曰: “君子有九思. 視思明, 聽思聰, 色思溫, 貌思恭, 言思忠, 事思敬, 疑思問, 忿思難, 見得思義.”

  공자왈    군자유구사  시사명  청사총   색사온   모사공   언사충  사사경  의사문  분사난  견득사의          

  


    일상생활에서 군자가 갖춰야할 태도내지 수행법을 아홉 가지로 정리했습니다. 불가에 팔정도(八正道)가 있다면 유가에는 구사(九思)가 있는 셈입니다. 그럼 팔정도와 구사를 한번 비교해볼까요?

     

  팔정도는 고통의 원인인 탐욕, 성냄, 어리석음을 뜻하는 탐진치(貪瞋痴)의 삼독(三毒)을 제거하고 열반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수행법을 말합니다. 정견(正見‧바른 이해), 정사(正思‧바른 생각), 정어(正語‧바른 말), 정업(正業‧바른 행동), 정명(正命‧바른 생활), 정정진(正精進‧바른 노력) 정념(正念‧바른 새김) 정정(正定‧바른 정신통일)입니다.      


  구사 중에서 언사충과 사사경은 각각 정언과 정업에 대응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과 행동을 바르게 하라는 점에서 공명합니다. 시사명과 청사총은 정견으로 합쳐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물을 왜곡됨 없이 있는 그대로 인식하려는 것이니 곧 밝게 보고 맑게 듣는 것에 해당합니다. 견득사의는 정명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명은 의식주 문제를 해소하고 생업에 종사함에 있어서 떳떳하고 정당한 방식을 추구하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는 엇비슷한 내용입니다. 구사의 나머지 넷과 팔정도의 나머지 넷은 공통점보단 차이점이 많습니다. 불가와 유가의 차이점을 여기서 끌어낼 수 있습니다. 불가가 내면에 침잠한다면 유가는 그것의 외적 표출에 집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불가의 가르침이 종합적이고 추상적이라면 유가의 가르침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이라는 차이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팔정도의 정사, 정념, 정정진, 정정 이 4가지는 내적 수행과 관련된 개념입니다. 바른 사유라는 뜻의 정사는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윤회의 업을 끊어내고 자비심을 실천하겠다는 마음가짐을 갖추는 것을 말합니다. 바른 새김 또는 바른 깨어있음으로 풀이되는 정념은 몸과 감각, 마음을 운용함에 있어 딴 눈 팔지 말고 그 자체에 집중하라는 주문입니다. 정정진은 이런 수행과정에서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라는 것이고, 정정은 바른 선정, 바른 정신통일이라 하여 명상수행을 바르게 하라는 겁니다.          


  구사의 색사온, 모사공, 의사문, 분사난는 둘씩 짝지을 수 있습니다. 색사온과 모사공은 표정과 태도와 관련돼 있습니다. 내면의 생각이 외면으로 표출되는 것을 중시한 겁니다. 유가에서 강조하는 예(禮)의 구체적 양태입니다. 의사문과 분사난은 구체적으로 반신반의할 때와 분기탱천할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대처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한 지혜가 담겼습니다. ‘모르겠으면 반드시 아는 척하지 말고 물어라’와 ‘화났을 땐 화풀이한 뒤 뒷감당을 떠올려보라’는 겁니다.             


  이처럼 공자의 가르침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던 프로네시스(phronesis)를 지향합니다.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실천적 지혜를 뜻합니다. 개념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공자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러한 프로네시스를 토대로 인생을 살아가거나 공동체의 문제를 해결할 때 중용의 지혜가 필요하다고 한 점도 같습니다. 반면 불교의 가르침은 상대적으로 추상적이고 보편적 지혜인 소피아(sophia)의 요소가 더 강합니다. 진리의 측면에서 보면 소피아가 더 차원 높지만 실천의 측면에서 보면 프로네시스가 우위에 서게 됩니다.            


  공자의 이런 실천적 프로네시스를 이론적 소피아로 격상시키기 위해 추상성과 보편성을 강화하고 추가한 것 그게 바로 맹자와 주자가 감행한 것입니다. 맹자의 성선설과 사단칠정론은 고도로 추상화한 도가와 명가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고차원적 윤리론으로 재무장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주자의 성즉리와 이기론 역시 당송시대 선풍적 인기를 얻은 선불교의 치열한 논리싸움에 대응하기 위해 고차원적 존재론으로 변신을 시도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부작용으로 현실 및 대중과 동떨어진 공리공론으로 흘러가게 됩니다. 그러자 공자사상의 프로네시스적 면모를 지행합일이라 주창하고 나선 것이 양명학이고, 맹자와 주자의 해석틀을 버리고 공자 그 자체로 돌아가는 것이 고증학입니다.           


  21세기 지금 왜 우리가 논어를 읽어야 할까요? 맹자와 주자의 영향으로 진부한 도덕론자 아니면 창백한 지식인으로 박제된 공자가 아니라 생동하는 현실참여의 지식인으로서 공자를 재발견하기 위함입니다. 야스퍼스가 인류의 영원한 정신적 축을 형성한 시대라 하여 ‘축의 시대’라 명명한 청동기 시절의 4대 스승으로서 싯다르타, 소크라테스, 예수와 더불어 동아시아를 대표해 선정한 공자에게 정당한 평가를 돌려주기 위함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공자가 제경공을 미워한 까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