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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5, 4

16편 계씨(季氏) 제3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작록의 권한이 공실을 떠난 지 5세가 됐고, 정치가 대부의 수중에 들어간 지는 4세가 됐다. 따라서 삼환의 후손이 쇠퇴할 때가 됐다.”


孔子曰: “祿之去公室五世矣, 政逮於大夫四世矣, 故夫三桓之子孫微矣.”

공자왈 녹지거공실오세의 정체어대부사세의 고부삼환지자손미의



계씨 편은 숫자놀음의 편입니다. 이번 장에선 5, 4, 3이란 숫자가 눈에 띕니다. 먼저 3이란 숫자에서부터 시작해볼까요? 공자의 모국인 노나라는 계손 씨, 숙손 씨, 맹손 씨의 세 귀족가문이 국정을 장악한 삼환정치가 문제였습니다. 그럼 그 삼환정치의 시작점을 어디로 봐야 할까요?


삼환이란 별칭은 노환공(희윤)의 세 아들이란 뜻에서 나왔습니다. 노환공의 적정자인 노장공(희동)이 제후가 된 뒤 배다른 동생 셋을 중용했습니다. 맹손 씨의 종주인 경보, 숙손 씨의 종주인 숙아, 계손 씨의 종주인 계우입니다. 그러다 노장공의 뒤를 누가 잇느냐의 문제를 두고 치열한 궁정암투가 벌어졌습니다.


삼환의 맏이인 경보는 노장공의 정실부인인 애강(愛姜)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애강에겐 자식이 없었으니 노장공에겐 적자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경보는 노장공이 죽고 나면 형의 권좌를 차자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아래 동생 숙아도 이를 지지했습니다. 막내인 계우는 노장공의 밀명을 받고 노장공의 서자인 공자 반(희반)을 옹립하기 위해 숙아를 자결케 하고 경보를 추방합니다. 그러나 희반은 즉위한 지 두 달 만에 경보의 사주를 받은 역사(力士)의 손에 암살됩니다.


계우는 다시 노장공의 서장자인 희계(공자 계)를 제후에 앉히니 그가 노민공입니다. 하지만 노민공 역시 재위 2년을 채우지 못하고 경보의 급습을 받아 숨집니다. 계우는 다시 희계의 동생 희신을 제후로 추대하니 그가 노희공입니다. 노희공은 그 보답으로 계우를 상경으로 삼으면서 비(費)읍과 문양(汶陽) 땅을 하사합니다. 막내인 계손 씨 가문의 세력이 가장 큰 이유가 여기서 연유합니다. 그런 계우의 보좌를 받은 노희공이 즉위한 첫 해 내란상황의 주범인 경보를 자결케 하고 정국이 안정을 찾습니다.


노희공은 내란 상황을 종결짓기 위해 경보와 숙아의 자식에게 아비의 뒤를 잇게 하니 그들이 성()읍을 영지로 받은 맹손 씨와 후(郈)읍을 하사 받은 숙손 씨의 종주가 됩니다. 이후 이들의 후손이 대대로 노나라 경상의 자리를 나눠 갖고 수백 년간 국정을 쥐락펴락하는 삼환정치의 시대가 열립니다. 따라서 삼환정치의 기원은 보통 노장공이 죽은 기원전 662년으로 보거나 노희공이 즉위한 기원전 659년으로 봐야 합니다.


다음은 숫자 5로 넘어가 볼까요? 작록(爵祿)이라 하면 관작(官爵)과 녹봉(祿俸)을 합친 말입니다. 관작은 실무직인 관직과 명예직인 작위를 아우르는 단어입니다. 녹봉은 관료에게 주는 급료를 말하는데 정기 급료인 녹과 공을 세웠을 때 주는 보너스 개념의 봉을 합친 개념입니다. 작록의 권한은 왕이나 제후에게 있습니다. 왕의 가문을 왕실이라 하고 제후의 가문을 공실이라고 합니다.


공자는 작록의 권한이 노나라 공실을 떠난지 5세(世)가 됐다고 말합니다. 世는 대(代)와 같은 개념인데 당태종 이세민 시절부터 피휘를 위해 세를 대로 바꿔 쓰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보통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올 때는 세, 현재에서 과거로 거슬러올라갈 때는 대를 씁니다.


대부분의 주석서는 이를 노선공(희퇴)-노성공(희흑굉)-노양공(희오)-노소공(희주)-노정공(희송)의 시대로 풀이합니다. 노선공은 노희공의 손자이자 노문공(희흥)의 아들로 기원전 608년 제후가 된 인물입니다. 삼환정치의 기원으로 봐야 할 시점보다 50년 뒤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유가 뭘까요?


노문공에겐 희오와 희시라는 두 명의 적자가 있었습니다. 노문공이 죽자 적장자인 희오가 재위를 물려받지만 즉위한 지 몇 개월 만에 시해당하고 그 아우인 희시도 살해됩니다. 그리고 겨우 두 살밖에 안된 서자 희퇴가 제후가 되니 그가 노선공입니다.


갓난아기를 제후 자리에 앉혀놓고 인사권을 장악한 삼환이 마음껏 활개 치는 세상이 됐다고 본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되풀이됐으니 노성공과 노양공 역시 세 살 나이에 재위에 오릅니다. 따라서 여기서 5세의 시작점을 삼환이 인사권을 쥐고 흔들게 된 노선공 때부터로 봐야 한다는 것이니 설득력 있습니다.


다음으로 숫자 4로 넘어가 볼까요? 정치가 대부의 수중에 넘어가고 4세가 지냈다는 것은 어떻게 풀어야할까요? 삼환의 우두머리인 계손 씨 종주만 따져보면 공자가 죽기 전까지 8세나 됩니다. 계우-중무일(요절해 시호가 없음)-계문자-계무자-계도자-계평자-계환자-계강자. 앞서 언급한 기준으로 노선공 때 계손 씨의 종주는 계문자이고 노정공 때의 종주는 계환자이니 5세가 됩니다. 누군가 한 명이 빠져야 합니다.


보통은 그 한 명을 종주가 되고 얼마 안돼 숨진 계도자라고 봅니다. 저는 공자가 계손씨 종주 중 유일하게 높이 평가한 계문자가 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계문자는 노문공-노선공-노성공-노양공 아래서 대부를 지내며 내란의 위기를 극복하고 민심을 안정시켰을 뿐 아니라 신중하고 청렴했습니다. ‘춘추좌전’을 보면 계문자가 죽고 장례를 치르려고 보니 ‘비단옷을 입은 첩이 없고, 곡식을 먹는 말도 없고, 금과 옥으로 장식된 기물도 없고, 일상용품도 오직 한 사람 몫밖에 없었다. 이것으로 계문자가 공실의 충직한 신하임을 알았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공자의 관점에서 봤을 때 계문자 시기 노나라 제후가 잇따라 어린 나이에 즉위해 작록의 권한이 공실을 떠났으나 대부가 전권을 휘두른 것까지는 아니라고 본 듯합니다. 대부가 전권을 휘두른 것은 계문자의 아들 계무자 때부터로 봐야 합니다. 계무자는 노양공 11년 2군(1군은 군사 1만2500명과 그 가솔)으로 편성된 노나라 군대를 3군으로 확대 재편하면서 삼환의 세 가문이 각각 1군을 지휘하게 하는 조처를 단행합니다.


계무자의 손자인 계평자는 한술 더 뜹니다. 노소공 5년에는 군대를 다시 넷으로 나눠 계손씨가 그중 둘을, 숙손씨와 맹손씨가 각각 하나씩을 장악하고 각자 징세해서 그 일부만 공실에 공납하게 했습니다. 공실이 장악했던 군권과 조세 수입마저 삼환에게 넘어갔으니 ‘정치가 대부의 수중에 들어갔다’에 부합합니다.


공자가 제2장에서 언급한 중국 역사의 일반법칙을 제3장에서 노나라에 적용했다고 봐야 합니다. 그에 따르면 작록의 권한이 공실을 떠나고 5세만에 망해야합니다. 그러나 삼환정치는 계강자가 죽고 53년 뒤인 기원전 415년 노목공(희현)이 즉위할 때까지 계속 됐습니다. 이후 맹손 씨와 숙손 씨는 제나라의 침공을 받고 멸문했고, 계손 씨는 아예 노나라로부터 독립해 비(費)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따라서 5세가 되면 망할 것이란 예측은 틀렸지만 그 권력이 그리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내다본 것은 맞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계손 씨의 가신이던 양호의 발호를 목도하고 공자가 한 발언으로 보는 주석도 있습니다. 양호는 계환자 시절 하극상의 반란을 일으켰으니 '대부 4세'는 계무자-계도자-계평자-계환자로 얼추 맞아 떨어집니다. 하지만 노나라 제후는 노선공-노성공-노양공-노소공으로 4세에 그쳐 '공실 5세'와 부합하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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