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편 위령공(衛靈公) 제41장
공자가 말했다. “말은 뜻을 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子曰: “辭達而已矣.”
자왈 사달이이의
‘논어’에는 언어에 대한 두 가지 관점이 충돌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말을 앞세우고 말만 번드르르한 것에 대한 경계입니다. 교언영색(巧言令色)과 눌언민행(訥言敏行)으로 대표되는 태도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언어를 이해하고 터득해야 한다는 깨달음입니다. 지언(知言)으로 대표됩니다.
이번 장은 전자에 해당합니다. 언어는 참으로 많은 기능이 있는데 의사전달력 하나면 충분하다고 말하고 있으니까요. 공자 시대에는 세치 혀를 잘못 놀렸다고 멸문지화를 입기도 하고, 세치 혀를 잘 놀려 고관대작이 될 수도 있었습니다. 공자는 전자를 딱하게 여겼고, 후자를 과분하다고 여겼습니다. 화(禍)가 될 수도 있고 복(福)이 될 수도 있지만 그 둘 다 실체가 아니라 그림자에 놀아나서 그러하다고 여겼기에 언어는 최소화하는 것이 최선이라 여겼던 것 같습니다.
20세기 언어학의 창시자 가운데 한 명인 로만 야콥슨은 언어의 기능을 6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의사를 전달하는 정보적 기능, 감정과 판단을 담는 표출적 기능,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요구하는 지령적 기능, 화자와 청자의 관계지향적인 사교적 기능, 언어와 언어 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관어적 기능, 표현력에 초점을 둔 미학적 기능입니다. 야콥슨이 슬쩍 걸치듯 언급하고 지나간 7번째 기능도 있습니다. ‘마술적이고 주술적인 기능’인데 말이 곧 현실이 되게 만드는 힘에 대한 것입니다. 흔히들 '말이 씨앗이 된다'고들 하는 현상을 지칭한 것입니다.
공자는 그중에서 정보적 기능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가 아들 공리에게 ‘시를 배우지 않으면 말할 게 없다(不學詩 無以言)’라고 한 것부터가 이를 위반한 것입니다. 언어의 묘미를 다룬 시를 이해하라면 미학적 기능에 대한 이해가 필수입니다. ‘있는 그대로 기술할 뿐 창작하지 않는다’는 공자의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원리 역시 이를 위반한 겁니다. 거기엔 현실비판의 감정과 판단을 우회적 방식으로 담아내는 표출적 기능과 그 글을 읽는 사람의 내면적 변화를 촉구하는 지령적 기능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뿐이겠습니까? 유교에서 조상에게 제사지낼 때 읽는 축문에 어느 정도 주술적 기능이 담겨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공자가 과연 이를 몰랐을까요? 야콥슨처럼 체계화하지 않았을지언정 서너 가지 이상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단정적 표현을 쓴 것일까요? 이는 후대의 착오입니다. ‘논어’에서 공자의 말은 단독적이고 일방적 발언이 아닙니다. 제자라는 청자를 염두에 두고 발화된 것입니다.
이 장의 발언 역시 분명 그 상대가 존재할 것이고 그 상대는 자공이나 재아처럼 말재주가 뛰어난 제자이거나 반대로 말솜씨가 서투른 누군가였을 겁니다. 전자의 경우에는 화려한 언변을 경계하기 위해, 후자의 경우엔 어눌한 화술에 주눅 들지 말라고 격려하기 위해 던진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맥락이 생략되고 공자의 말만 남았기에 단편적이고 허술하게 들리게 된 것입니다.
15편 위영공 편부터는 이런 식으로 그 말을 듣는 청자(제자)는 사라지고 화자(공자) 혼자 독백하는 것 같은 장이 계속 등장합니다. ‘논어’의 생동감을 해치고, 공자가 마치 편벽된 주장을 고집하는 꼰대처럼 비치게 만든 이유입니다. 따라서 이들 장을 읽을 때는 그 상대가 되는 구체적 제자를 떠올리면서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주장이 언제 어디서나 보편타당하다고 생각하는 교조주의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