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편 위령공(衛靈公) 제34장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세세한 실무는 잘 모를 수 있으나 중차대한 일을 맡아 처리할 수 있다. 소인은 중차대한 일을 맡아 처리할 순 없지만 세세한 실무는 잘 할 수 있다.”
子曰: “君子不可小知而可大受也, 小人不可大受而可小知也.”
자왈 군자불가소지이가대수야 소인불가대수이가소지야
소지(小知)와 대수(大受)가 비교되고 있습니다. 무엇이 소지이고 무엇이 대수일까요? 현대 관료제 사회에서 공무원들이 하는 일이 대부분 소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법규와 매뉴얼대로만 일 처리하는 것이 소지입니다. 한마디로 매뉴얼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그 역시 국민의 일상을 위해 필요한 일이니 거기에 충실한 것 자체는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문제는 법규만 딸딸 외워서 ‘철밥통’이 됐다고 좋아하면서 정말 국민을 위해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볼 생각은 못하고 법률과 규정과 매뉴얼만 따질 때 발생합니다. 그게 소지에 지나지 않음을 인정할 줄 모르고 무슨 거창한 나랏일이라도 되는 줄 알고 뻐기며 완장질하는 경우입니다. 자신들이 봉사하는 국민의 편익을 위해 때로는 매뉴얼도 고쳐가면서 일을 해야 하거늘 철밥통 지키려는 보신주의와 생색내며 대접받고픈 권위주의에 사로잡힐 때 발생하는 부작용입니다.
논어 20편 '요왈(堯曰)' 제2장에서 공자가 정치의 4가지 악행 중 하나로 꼽은 유사(有司)의 행태가 곧 완장질입니다. 유사는 창고를 지키는 하급관료를 말합니다. 창고에 쌓아둔 곡식이나 무기를 쌓아뒀다가 기근이 발생하거나 전쟁이 발발하면 이를 나눠주는 단순 업무를 수행합니다. 그런데 그때나 지금이나 못난이들은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게 군다고 마땅히 내어줄 것을 내어주면서도 사람을 힘들게 하고 뒷돈을 챙기곤 합니다. LH공사 직원들처럼 그게 무슨 '라이선스 투 스틸(licence to steal)'이라도 되는 양 곳간 물품을 팔아서 자기 뱃속을 채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군자는 그런 소지를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규정이 어떻고 매뉴얼이 저렇고 떠들어대는 잔소리를 들으면서 “아 그래요? 제가 그건 미처 몰랐네요”라고 뒤통수 긁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말을 듣고 손가락만 빨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럼, 규정과 매뉴얼을 고쳐야겠네요”라거나 “규정이나 매뉴얼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면 제가 받겠습니다”라면서 팔을 걷고 나서는 사람입니다. 규정과 매뉴얼이라는 사슬에 묶인 노예가 아니라 그 사슬을 끊고 백성을 위한 제도와 정책을 새롭게 설계하는 사람입니다. 공자는 그럼 사람들이 하는 일을 대수로 표현한 것입니다.
영어에서 정치인을 뜻하는 단어가 둘이 있습니다. 정치가(政治家)로 번역되는 스테이츠맨(statesman)과 좋게 말하면 정치인, 나쁘게 말하면 모리배로 번역되는 폴리티션(politician)입니다. 스테이츠맨이 하는 일이 대수고, 폴리티션이 하는 일 소지입니다. 공무원은 스테이츠맨과 폴리티션 아래서 세세하고 구체적인 실무를 처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일도 분명 중요합니다. 어떤 분야에서건 실무의 중요성은 결코 간과할 수가 없는 법이니까요. 따라서 대수는 못되고 소지를 수행한다는 점만 분명히 자각하고 겸손하고 청렴하게 일처리만 하며 살아간다면 충분히 존중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에서 대수는 따로 있을 수 있으니까요. 다만 소지의 일을 하면서 대수라도 수행하는 양 거들먹거리거나 완장질 하는 순간 당신은 저질 내지 악질 공무원이 되는 겁니다. 물론 예외도 존재합니다. 당신이 규정과 매뉴얼만 따지고 들지 않으면서 때론 그 한계를 뛰어넘기도 하고 때론 그걸 개선하는 데 앞장선다면 당신이 하는 일이 바로 대수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