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편 위령공(衛靈公) 제28장
공자가 말했다. “뭇사람이 싫어하더라도 반드시 살피고, 뭇사람이 좋게 말하더라도 반드시 살피라.”
子曰: “衆惡之, 必察焉, 衆好之, 必察焉.”
자왈 중오지 필찰언 중호지 필찰언
앞서 ‘타인의 잘못에 대처하는 방법’에서 밝혔듯이 기독교 문화권은 대타자를 절대자로 상정하고 그 절대자 앞에 벌거벗은 것과 같은 효과를 낳는 죄의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이와 달리 유교문화권에선 대타자를 공동체로 상정하고 그 공동체 앞에서 벌거벗는 것과 같은 수치심을 자극하는 방식으로 사회를 통제하려 합니다.
라캉의 정신분석학 용어인 대타자는 프로이트의 초자아(슈퍼에고)를 외부화한 개념으로 이해하면 쉽습니다. 초자아가 내면의 목소리라면 대타자는 외부에서 나를 응시하고 감시한다고 간주되는 존재입니다. 사실 기독교 문화권의 대타자는 프로이트의 초자아에 가깝고 유교문화권의 대타자가 라캉의 대타자에 더 가깝습니다.
좀 더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기독교 문화에선 신이 나의 행동뿐 아니라 마음가짐까지 속속들이 파악한다고 여깁니다. 유교 문화권에선 공동체의 눈길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응시한다고 여깁니다. 그 응시의 눈길이 집요하기에 자칫하면 속마음까지 들킬 수도 있지만 겉과 속을 철저히 분리해 행동한다면 속여 넘기는 것도 가능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의식의 세계에선 신의 눈길이 더 무섭기에 타인의 눈길은 크게 의식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면 수치심의 세계에선 신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는 대신 타인의 눈길이 엄청나게 중요해집니다. 그래서 남들 눈에 어떻게 비치느냐를 엄청 의식하며 살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타인의 눈길을 의식하다 보면 부화뇌동하기 십상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덩달이족’이 많아지는 겁니다. 공자는 이렇게 덩달이족이 되는 걸 경계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뭐라 하든 스스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함부로 미워하고 좋아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테마는 4편 이인 제3장에서도 등장합니다. ‘오직 어진 사람만이 사람을 좋아하고 미워할 수 있다(惟仁者 能好人 能惡人).’ 어진 사람은 대중심리에 휩싸이지 않고 독자적 판단으로 호오를 결정하기에 신뢰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13편 자로 제24장에서도 슬쩍 변주됩니다. ‘한 동네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거나 모두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느냐’는 자로의 질문에 공자는 “그 동네의 착한 사람이 모두 좋아하고 착하지 못한 사람이 모두 미워한다면 모를까 그 전엔 섣불리 판단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대중의 단편적 파단에 부화뇌동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놀랍게도 2500년 전 공자의 이런 충고는 뉴스 미디어와 소셜 미디어로 홍수를 이룬 21세기에 기막히게 주효합니다. 가짜 뉴스와 음모론으로도 모자라 온갖 선정적 보도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보니 뉴스만 믿고 누군가를 미워하거나 사랑했다가는 낭패를 겪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공자님 말씀을 좇아 뉴스만 보고 누군가의 인생을 함부로 재단하는 일은 우리 모두 삼가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