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역사시대의 그라운드 제로

15편 위령공(衛靈公) 제26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나는 오히려 사관이 글을 빼놓고 기록하지 않음을 보았고, 말을 소유한 자가 남에게 빌려주어 타게 하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은 이를 볼 수 없게 됐구나!”


子曰: “吾猶及史之闕文也 有馬者借人乘之 今亡矣夫!”

자왈 오유급사지궐문야 유마자차인승지 금무의부



제자의 구체적 질문이 빠져 있는 탓에 그 의미가 불분명해진 공자의 발언입니다. 공자의 답을 토대로 제자의 질문 내지 발언을 재구성해보면 아마도 이렇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예전의 사관은 역사를 빠짐없이 기록하였다고 들었는데 요즘 사관은 빠뜨리는 것이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타고 갈 말이 없으면 걸어서라도 어떻게든 목표지점까지 가야 하는 법이거늘 너무 성의가 없는 것 아닌가요?”


공자의 답은 그런 제자의 허를 찌르는 것이었습니다. “아니다. 반대로 예전의 사관은 직접 보지 못하거나 정확한 상황 파악이 안 됐을 경우엔 공란으로 비워두는 정직함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공란을 채우기 급급해 자신이 직접 본 것도 아니고 정확한 사정도 조사해보지 않은 채 풍문에 근거한 기록을 남기다 보니 신뢰할 수 없는 기록이 많아졌다. 또 타고 갈 말이 없을 땐 말 있는 사람으로부터 빌려 타면 되는데 요즘은 인심이 각박해져서 말을 빌려줄 생각을 안 한다. 너 자신이 그렇게 역사기록에 대한 사명감이 남다르다면 사관을 비판하기에 앞서 왜 네가 직접 사실관계를 검증해보고 이를 기록으로 남길 생각을 안 하는 것이냐?”


공자가 이렇게 말한 이유는 아마도 그 제자가 말만 앞세우고 행동이 따르지 못했기 때문일 겁니다. 누군가 기록으로 남긴 역사서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쉽습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확인하거나 전후 사정을 두루 살핀 다음에 양심에 거리낌이 없을 때 비로소 기록을 남기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공자 자신이 노나라 역사서인 ‘춘추’를 집필하고 편집을 주도하였기에 더욱 절실히 느끼는 문제였을 겁니다. 그래서 직접 해보지도 않고 손쉽게 비판하는 것을 경계하는 차원에서 한 말입니다.


이런 맥락을 감안하지 않고 공자의 발언 자체를 진리로 여기게 되면 큰 오해가 발생합니다. 중국에서 역사시대는 보통 기원전 841년부터로 추정합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는 모두 10개의 연표가 실려 있는데 이중 주나라와 주요 제후국의 연표를 비교한 ‘12제후연표’의 출발점이 기원전 841년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원전 842년 이전의 역사 기록은 정확도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소리입니다. 실제 그 전의 역사기록은 파편적이고 연도도 오락가락합니다. 따라서 역사의 공백을 뜻하는 사지궐문(史之闕文)이 유독 고대에 많은 것은 기록 의식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지 공자가 말한 정직함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이런 중국의 역사시대 규정과 관련해선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기원전 841년이 공화(共和)시대의 원년이란 점입니다. 共和는 근대 서양문물을 발빠르게 수입한 일본이 세습군주가 없는 정치체제를 뜻하는 라틴어 'res publica‘의 번역어로 채택한 한자입니다. 거기엔 무슨 사연이 숨어있을까요?


기원전 842년 주나라를 통치하고 있던 왕은 주왕조 10대 왕인 여왕(勵王)이었습니다. 그는 영국의 존 왕과 러시아의 이반 뇌제(이반 4세)의 나쁜 점을 합쳐놓은 폭군이었습니다. 왕실 재산이 자신의 사치를 감당할 수 없자 이를 늘이려고 산림천택(山林川澤)을 왕의 소유로 선포하고, 평민들이 그 안으로 들어가 나무를 하거나, 채집, 낚시, 사냥을 할 경우 세금을 내도록 했습니다. 존 왕 역시 영국 내 수많은 숲을 왕실 소유로 선포하고 사냥이나 채집을 금지시켰으며 온갖 세금을 귀족, 평민 가릴 것 없이 부과해 모두로부터 미움을 받아 결국 1215년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의 탄생을 촉발시켰다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주나라의 귀족과 백성도 이에 반발했습니다. 그러자 여왕은 위(衛)나라 출신 무사(巫師‧남자 샤먼)들로 조직된 일종의 사상경찰을 조직하는 걸로 맞대응하고 나섰습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속마음을 다 꿰뚫어 본다면서 수도호경의 곳곳을 다니면서 불온한 생각을 품은 자라면서 자의적 체포와 치죄를 가했습니다. 객관적 근거도 없이 마구잡이 투옥과 고문, 살생을 벌인 공포정치가 펼쳐진 것입니다.


이는 이반 뇌제가 ‘오프리치니키'라는 차르(러시아 황제) 직속 친위대를 조직해 자신에게 반발하는 세력을 무력 진압한 것과 유사합니다. 전통적으로 차르를 위협해온 보야르(러시아 중앙귀족)를 견제하기 위해 무소불위의 치외법권을 지닌 비밀부대를 조직한 것인데 검은색 의상 차림의 이들은 '차르의 사냥개'로 불렸고 후대에는 ‘KGB의 원조’라는 평가를 받을 만큼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여왕의 폭정을 견디다 못한 수도 호경의 국인(國人‧도시에 사는 귀족과 백성)이 기원전 842년 중국 역사상 최초의 반정(反正)을 일으킵니다. 궁궐을 공격해 여왕의 무사들을 죽이고 억울한 죄수들을 풀어줬습니다. 간신히 목숨만 건진 여왕은 돼지를 키우는 체(彘) 땅으로 도망가 납작 엎드립니다. 반정을 일으킨 귀족들은 왕조를 바꿀 생각까지는 못한 듯 일종의 공동협의체를 구성해 햇수로 14년간 공동통치를 하는데 훗날 이를 공화정치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왜 공화일까요? 여기엔 여러 설이 엇갈립니다. 왕실 종친인 소공(召公)과 주공(周公)이 여러 제후와 협의을 통해 평화롭게 공동 통치해서라는 설과 공(共)이란 영지의 제후인 공백(共伯) 화(和)가 왕을 대신해 섭정을 해서라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분명한 것은 공화시대가 전설상의 중국 최초의 임금인 황제(黃帝) 이후 1911년 쑨원(孫文)의 중화민국이 세워지기 전까지 수천 년 역사에서 기록상으로는 유일하게 전제정이 아닌 시대였다는 겁니다.


그럼 왜 공화 원년 이후 역사기록이 명확해지기 시작한 것일까요? 여러 사람이 합의를 통해 공동 통치를 하기 위해선 회의가 불가피했고 그때마다 자연스럽게 기록을 하는 문화가 정착됐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의사결정이 자의적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상당한 근거를 갖고 결정됐음을 공표하기 위해서라도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합의했음을 명기하게 됐을 겁니다. 이는 여왕이 병들어 죽고 그의 맏아들 희정(姬靜)이 선왕(宣王)으로 즉위해 전제정이 부활한 기원전 828년 이후에도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게 됐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수천 년 중국 역사에서 겨우 14년에 불과했던 비(非)전제정의 일천한 경험이 중국의 역사시대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keyword
펭소아 도서 분야 크리에이터 프로필
팔로워 132
매거진의 이전글아부와 인내부족은 난을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