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편 위령공(衛靈公) 제9장
공자가 말했다. “뜻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목숨을 구하고자 어짊을 해치느니 자신을 희생하여 어짊을 완성한다.”
子曰: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자왈 지사인인 무구생이해인 유살신이성인
뜻있는 선비(志士)와 어진 사람(仁人)은 군자(君子)의 다른 표현입니다. 군자는 도와 덕을 추구하는 사람으로서 인의(仁義)의 실천을 중시합니다. 지사는 그중에서 의로움(義)을, 인인은 어짊(仁)을 추구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따라서 지사와 인인을 합치면 군자가 되는 것입니다.
군자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기준이 ‘구생해인(求生害仁)’과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고 공자는 말합니다. 전자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어짊을 포기하고 훼손하는 것입니다. 후자는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어짊을 지키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이를 배우면 실감이 잘 가지 않습니다. 사람이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게 목숨입니다. 그걸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를 위해서라면 모를까. 어짊이라는 추상적 가치를 위해 목숨을 버릴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여기서 어짊의 의미를 다시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어질다’라는 말은 인격(수제‧덕)와 정치(치평‧도)에 모두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목숨까지 던진다는 것이 쉽게 이해되지는 않습니다. ‘고매한 인격’이나 ‘좋은 정치’가 과연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지켜야 할 대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가족이나 연인, 친구를 인질로 삼고 협박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가치란 게 도대체 뭘까요?
첫째로는 사람다움의 마지막 버팀목입니다. 인간으로서 최후까지 포기할 수 없는 인간적 존엄성을 지키는 일입니다. 맹자의 표현처럼 ‘차마 할 수 없는 일’을 강요받을 때 목숨 바쳐서라도 그걸 막게 하는 일입니다. 둘째로는 개인적 차원을 넘어서 내가 속한 국가공동체가 추구하는 총체적 가치와 신념입니다. 그 국가공동체가 무너질 경우 함께 사라져버릴 무엇입니다. 근대사회에선 자유, 평등, 평화, 민주, 공화와 같은 가치일 것이고 공자의 시대에는 인의와 예악으로 대표되는 문명질서일 것입니다.
전자는 인간으로서 마지막 위엄을 지키는 도덕적 차원의 것이고, 후자는 내가 속한 공동체를 수호하기 위한 국가적‧사회적 차원의 것입니다. 누군가 당신이나 주변 사람을 인간이하의 존재로 만들려 때 그에 저항하는 것이자 당신의 공동체와 그 가치를 훼손하거나 파괴하려 할 때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살싱성인의 인은 이렇게 2가지 차원으로 이해될 때 비로소 가시적 실천의 영역에 들어오게 됩니다. 도덕적 차원만 생각하면 사랑 또는 자비로 표현될 수도 있습니다. 사회적 차원에선 공자의 말처럼 사문(斯文)이나 예악(禮樂)이 될 수도 있고 현대적으론 자유, 평등, 동포애, 평화, 정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런 가치 수호를 위해 실제 자신의 목숨까지 던지는 것은 보통사람(소인)에겐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기에 그걸 실천 못했다 하여 비난할 순 없습니다. 하지만 군자라면 구생해인을 포기하고 살신성인을 실천할 수 있어야한다고 공자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처럼 소인인 사람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어젊에는 도덕과 정치 2가지 영역이 겹쳐져 있다는 점입니다. 20세기 신학자 라인홀트 니버는 그 둘을 명쾌하게 분리하기 위해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인간’을 썼습니다. 도덕이 개인적 차원의 문제라면 정치는 사회적 차원의 문제이므로 중층과 겹눈의 관점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입니다.
공자는 그런 니버와 반대로 그 둘이 하나로 포개진 가치 영역으로서 어짊을 탐구했습니다. 공자가 주창한 어짊이란 개념의 독창성이 여기에 있습니다. 거기엔 도덕과 정치가 ‘따로 또 같이’ 작동하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