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편 위령공(衛靈公) 제7장
공자가 말했다. “올곧구나, 사어여! 나라에 도가 있어도 화살 같았고, 나라에 도가 없어도 화살 같았다. 군자로다, 거백옥이여! 나라에 도가 있으면 벼슬하고, 나라에 도가 없으면 자신의 재능을 둘둘 말아서 가슴속에 감출 수가 있으니.”
子曰: “直哉, 史魚! 邦有道如矢, 邦無道如矢. 君子哉, 蘧伯玉! 邦有道則仕, 邦無道則可卷而懷之.”
자왈 직재 사어 방유도여시 방무도여시 군자재 거백옥 방유도즉사 방무도즉가권이회지
위령공 편이어서 그런지 위(衛)나라 대부 2명이 나란히 등장합니다. 사어(史魚)와 거백옥(蘧伯玉)입니다. 중국의 삼국시대 위(魏)나라 때 편집된 ‘공자가어’에 따르면 두 사람은 긴밀하게 엮인 인물입니다. 위령공의 충신이었던 사어는 재야에 묻혀있던 거백옥을 여러 차례 천거합니다. 위령공은 외모만 빼어난 미자하(彌子瑕)에 반해서 이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습니다. 이를 통탄한 사어는 병들어 죽어가면서 “살아서 군주를 바로잡지 못했으니 죽어서도 예(禮)를 이룰 수 없다. 내가 죽거든 주검을 북당 창문 아래에 두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위령공이 조문을 왔다가 그 연유를 듣고 비로소 미자하를 내치고 거백옥을 등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를 시체가 되어서도 간한다는 뜻의 ‘시간(屍諫)’이라 하고 사자성어로는 ‘신후지간(身後之諫)’이라고도 합니다. ‘공자가어’에는 이에 대한 공자의 평도 기록돼 있습니다. "옛날 간언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도 죽으면 그걸로 끝이었다. 사어처럼 죽은 뒤에도 주검으로써 간언하여 그 군주를 충성으로 감동시킨 사람은 없었으니, 올곧다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古之列諫之者, 死則已矣, 未有若史魚而尸諫, 忠感其君者也, 不可謂直乎?)"
대부분의 ‘논어’ 주석서는 이를 토대로 사어는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한결같이 올곧은 선비이고 거백옥은 시류에 맞춰 나가고 물러남을 안 지혜로운 선비라고 풀이합니다. 어떤 주석서에선 형세를 살피지 않고 강직하기만 한 사어보다는 형세에 따라 물 흐르듯 처세한 거백옥이 한 수 위라고 평합니다. 거백옥이 대부로 발탁된 것이 온전히 사어의 사심 없는 추천 때문이었는데 왜 사어 보다 거백옥을 높이 평가하는 걸까요?
사어는 6편 '옹야' 제14장과 14편 '헌문' 제19장에 등장하는 축타(祝鮀)와 동일인으로 추정됩니다. 축(祝)은 성이 아니라 사직(토지신과 곡신)에 대한 제사를 관장하는 벼슬명입니다. 타(鮀)는 이름인데 ‘춘추좌전’에는 타(佗)로 표기돼 있습니다. 따라서 축타는 직함과 이름을 합친 것입니다. 그의 자는 자어(子魚)입니다. 축타는 제례를 관장하니 공자와 같은 유자(儒者)였는데 당시 유자의 벼슬명은 주로 사(史)를 썼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직함과 자를 합쳐서 사어(史魚)로도 불리게 됐다는 것이지요.
위령공(재위 기원전 543~기원전 493)은 제경공(재위 기원전 547~기원전 490)의 닮은꼴이었습니다. 재위 기간도 비슷한 동시대 인물로 둘 다 인품이나 능력은 별로였지만 신하를 잘 뒀습니다. 제경공에게 안영이란 명재상이 있었다면 위령공에겐 외교의 공어(孔圉‧중숙어 또는 공문자로도 불림), 의례의 축타, 군무의 왕손가(王孫賈)가 있었습니다. 이는 위령공처럼 무도한 사람이 제후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를 묻는 계강자의 질문에 공자가 답한 것이기도 합니다(14편 '헌문' 제19장).
위령공 즉위한 다음해인 기원전 544년 오나라 초대 왕이었던 수몽의 넷째 아들로 외교관으로 활약하며 사람 보는 안목이 남달랐던 계찰(季札)이 위나라에 왔을 때 남긴 말도 이를 뒷받침합니다. 그는 거백옥과 축타(‘춘추좌전’에선 사추‧史鰌란 이름으로 등장), 공숙문자(公叔文子) 등을 만난 뒤 "위나라에는 군자가 많으니 근심이 없겠소(衛多君子, 未有患也)"라고 평했습니다.
축타 역시 계찰만큼 사람 보는 눈이 뛰어났습니다. 계찰이 축타와 더불어 찬사를 보냈던 위나라 집정대부였던 공숙문자(공숙발‧公叔發 혹은 公叔拔)가 위령공을 집으로 초청해 만찬을 열기로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축타는 “주군은 탐욕스러운데 그대의 부유함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됐으니 화를 자초한 거나 다름없다”고 경고했습니다. 공숙문자가 당황하자 “그대는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기에 문제가 없을 것이요. 그러나 그대의 아들인 공숙수(公叔戍)는 교만하기에 장차 망명길에 나서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실제 공숙문자가 죽고 난 뒤 공숙술은 위령공의 눈 밖에 나 기원전 496년 결국 노나라로 망명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축타가 여러모로 공자를 닮았다는 점입니다. 그는 공자와 같은 유자로서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의례와 역사에 밝았습니다. 공자는 기원전 500년경 제경공과 노정공간의 협곡회담에서 외교의례를 관장하는 상례(相禮)를 맡아 예의에 어긋난 일을 벌인 제나라 군신에게 일대 망신을 안겨준 뒤 사구의 벼슬에 오르게 됩니다.
축타 역시 기원전 506년 당시 강대국으로 떠오른 초나라에 맞서기 위해 19개 나라의 제후가 소릉(召陵)에서 회맹할 때 위나라의 상례를 맡은 일로 명성을 얻게 됩니다. 당시 제후의 회맹에서는 맹세의 일환으로 희생의 피를 마시는 삽혈(歃血)이란 의례가 있었습니다. 여러 제후가 모였을 때 그 순서를 정하는 것이 중요했는데 축타는 위나라가 채나라보다 앞서야 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설파해 이를 관철시켰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유사품이란 생각에 그랬는지 축타에 대한 공자의 평가((6편 '옹야' 제16장)는 매우 박했습니다. “축타(祝鮀)처럼 말 꾸며내는 재주가 없거나 송조(宋朝)처럼 잘생기지 않으면 요즘 세상에선 화를 면하기 어렵겠구나!" 송조는 위령공의 부인 남자(南子)의 모국인 송나라 공실의 일원이었는데 남자가 위령공에게 애원해 위나라에 와서 대부가 된 사내입니다. 얼굴 팔아서 출세한 미남자의 대명사로서 앞서 언급된 미자하를 능가했던것 같습니다. 그런 송조와 나란히 언급하면서 아첨꾼의 대명사로 언급한 것이니 삽혈의 순서를 놓고 축타가 장광설을 늘어놓은 것을 일종의 곡학아세로 봤던 듯합니다.
반면 거백옥에 대한 평가는 일관되게 후합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가 존경하고 섬기는 사람은 다음과 같다. 주나라에는 노자가 있었고, 위나라에는 거백옥이 있었으며, 제나라에는 안평중(안영)이 있었으며, 정나라에는 자산이 있었으며, 노나라에는 맹손작('논어'의 맹공작)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공자가 자신의 역할 모델로 삼았던 자산, 안영과 나란히 거명될 정도로 존경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공자가 천하주유에 나선 뒤 위나라에 두 번째 머물 때는 거백옥의 집을 거처로 삼을 정도로 가까웠습니다.
‘논어’ 14편 헌문 제25장에도 거백옥에 대한 에피소드 하나가 전해집니다. 거백옥이 공자에게 보낸 심부름꾼으로부터 거백옥이 “잘못을 줄이려고 하시는데 아직 성에 차지 못하신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거백옥은 물론 그 심부름꾼에게까지 찬사를 보냅니다. ‘공자가어’에는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위령공이 늦은 밤 궁궐 밖에서 잠시 멈췄다가 지나가는 수레 소리를 듣고 부인에게 누군지 아느냐고 묻습니다. 부인은 남이 보지 않는 밤에도 주군이 있는 곳을 향해 예를 표하고 물러날 사람은 거백옥밖에 없다 했는데 확인해보니 거백옥이 맞았다는 겁니다.
‘장자’에도 거백옥은 두 차례나 등장합니다. ‘내편’ 제4장 ‘인간세’에서는 ‘사마귀가 성이 나면 수레바퀴에 맞선다’는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일화를 들면서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지 말라 설파합니다. ‘잡편’ 제3장 ‘칙양’에서는 ‘60세를 살면서 60번 변화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끊임없이 잘못을 바로잡으며 살았기에 매번 다른 사람으로 살아가는 초월적 존재가 됐다는 상찬입니다. 주역에 등장하는 ‘군자표변(君子豹變‧군자는 1년에 한 번씩 털갈이하는 표범과 같다)’에 부합하는 현인이자 공자가 그토록 강조했던 ‘물탄개과(勿憚改過‧잘못을 고치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의 화산인 셈입니다.
본명이 원(瑗)이고 자가 백옥(伯玉), 시호가 성자(成子)인 거백옥은 공자가 태어나기 8년 전인 기원전 559년 위헌공 시절에 이미 대부 벼슬을 지내고 있었으니 최소 30세 이상의 선배였습니다. 당시 동료 대부였던 손문자(손림보‧孫林父)가 폭군이던 위헌공을 축출하려는 계획을 털어놓자 “신하가 어찌 군주를 범할 수 있는가?”라며 외국으로 도피했습니다. 손문자가 거사에 성공하고 위헌공의 삼촌 또는 배다른 형인 위상공을 제후 자리에 앉힙니다.
제나라로 망명했던 위헌공은 12년 뒤인 기원전 547년 절치부심 끝에 집정대부인 영희(寗喜)를 사주해 위상공을 시해하게 하고 제후 자리로 복귀합니다. 이때 거백옥은 다시 영희로부터 도움을 요청받고 “주군이 쫓겨가는 일에 관여하지 않았는데 어찌 주군이 돌아오는 일에 관여하겠는가”라며 또 외국으로 도피했습니다. 그래서 위헌공이 복위한 뒤 중용되지 못했고 그 아들로 6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한 위령공도 중용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축타의 시간 덕에 다시 대부가 되고 공자의 후원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점을 종합해 보면 공자는 내면의 덕을 지키며 출사와 낙향을 오간 거백옥을 더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때 아첨꾼이라고 비판했던 축타에 대해서도 그 올곧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 한수 접어주게 된 것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축타를 송조에 비견했던 옹야 편의 발언은 축타가 살아있을 때 한 것이고 축타를 거백옥과 비견한 위령공 편의 발언은 그가 죽고 난 뒤의 것으로 봐야 합니다. 이 또한 공자가 무오류의 지극한 성인이 아니라 끊임없이 물탄개과를 실천한 군자임을 일깨워주는 텍스트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감동적이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