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편 위령공(衛靈公) 제5장
공자가 말했다. “무위(無爲)로 천하를 다스린 사람은 아마 순임금이었을 것이다! 그가 무엇을 하였던가? 몸가짐을 공손히 하고 바르게 남쪽을 바라보는 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이었다.”
子曰: “無爲而治者, 其舜也與! 夫何爲哉? 恭己正南面而已矣.”
자왈 무위이치자 기순야여 부하위재 공기정남면이이의
무위(無爲)는 도가의 개념으로 받아들여집니다. 하지만 제자백가 사상 중 순서로나 위상으로나 첫 번째에 해당하는 유가가상에도 이렇게 무위가 등장합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공자가 노자를 만나 예를 물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하지만 여러 모로 봤을 때 노자의 ‘도덕경’은 ‘논어’ 보다 후대의 작품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연구자에 따라서는 ‘노자’가 대략 4세기 작품으로 추정되는 ‘장자’의 내편 보다 후대의 작품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실제 ‘장자’에는 공자와 안연이 여러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그 대부분은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유가사상에 대한 풍자로서 창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장자’는 ‘논어’에 대한 속유(俗儒)적 이해에 대한 반격 차원에서 쓰였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노자’에 핵심 개념인 ‘무위자연(無爲自然)’ 역시 공자의 인(仁) 사상을 ‘유위(有爲)’, ‘작위(作爲)’, ‘인위(人爲)’로 규정하고 그에 대해 일종의 반론 성격으로 집필됐을 가능성이 짙습니다.
그러나 ‘장자’와 ‘노자’가 겨냥한 공자의 사상은 공자 본연의 혁명적 사상이라기보다는 그 제자들에 의해 축소, 왜곡된 충효사상 내지 서열사상에 가깝습니다. 공자 사상의 핵심은 혈통과 신분에 절대적 가치를 부여한 고대의 장벽을 학문과 도덕의 힘으로 무너뜨리는 것이었으며 무력과 힘에 기반한 정치를 사람중심의 정치로 전환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교육혁명, 도덕혁명, 정치혁명, 신분혁명의 요소를 두루 갖춘 사상혁명이었습니다.
이에 비하면 왕조교체에 정당성을 부여한 맹자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은 오히려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빙산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것은 공자의 후예를 자처하는 증자나 맹자 같인 이들이 자신들의 입신출세를 위해 공자사상의 이런 혁명성을 의도적으로 은폐하거나 간과했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공자가 고대의 정치를 이상화한 것은 그것을 고스란히 답습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사상혁명을 현실에 관철시키기 위해 과거의 역사적 사례에 자신의 사상을 투영해 적극 홍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임금의 자리를 자신의 아들이 아니라 능력 있는 신하에게 물려줬다는 요순의 선위(禪位) 설화는 부자승계를 당연시하는 당시의 혈통주의를 공격하기 위한 신분혁명을 옹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은나라 탕왕과 주나라 문왕‧무왕의 사례는 어질지 못한 정치는 반드시 도태되어야 한다는 정치혁명과 그 대체자는 힘이 강한 자가 아니라 학문과 덕이 출중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도덕혁명을 정당화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주공 단의 사례는 정통성은 있지만 무능한 성왕(단의 조카)을 지켜냈다 찬미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왕 같은 제왕이 아니라 주공처럼 교육을 통해 실제적 콘텐츠를 갖춘 사람이 통치자가 돼야 치국평천하가 이뤄진다는 교육혁명과 정치혁명을 설파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공자가 강조한 ‘온고지신(溫故知新)’과 ‘술이부작(述而不作)’의 진실입니다.
이를 증자는 축소했고, 맹자는 편집했습니다. 한나라 때 동중서는 이를 왜곡했고, 한유는 축소‧왜곡된 내용만 증폭했습니다. 송나라 때 주자는 그렇게 축소, 편집되고 왜곡, 증폭된 내용에 다시 도교와 불교의 세계관을 혼합했습니다. 그렇게 1000년에 걸친 오독과 곡해의 결과 혁명사상가였던 공자는 철 지난 성인군자론을 펼치는 도덕주의자이자 왕조정치와 신분질서를 정당화하는 보수주의자로 각인되고 말았습니다.
그런 공자를 임금보다 숭배하게 된 조선시대 500년을 거치면서 한국에서 공자는 보수의 아이콘이 되어버리는 역설이 빚어지게 된 것입니다. 놀랍지도 않습니다. 하나님 앞이 만인의 평등함을 주창하고, 길 잃은 양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약자를 최우선시하라는 예수가 한국에 상륙한지 불과 200여년 만에 보수의 아이콘이 된 것을 상기해보면 약과라고 해야 할 테니까요.
공자가 동아시아 사상의 원류이자 씨앗이라고 불려야 할 이유를 이 장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공자사상에는 이미 노자와 장자의 사유도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요임금으로부터 왕좌를 물려받은 순임금이야말로 무위의 실천자로서 상찬 받고 있습니다. 궁극의 도덕을 발현하는 사람으로서 공손한 자세로 남쪽을 바라보게 돼 있는 왕좌에 앉아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덕을 쌓고 이를 실천하는 것만으로 나라가 절로 다스려졌다고 말합니다.
아이러니한 일은 후대의 유학자들이 이를 두고 유가의 무위와 도가의 무위의 차이를 논한다는 것입니다. 유가의 무위는 현명한 신하(賢臣)를 기용하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일체의 인위를 거부하는 노장의 무위와 다르다는 식입니다. 노장의 무위는 공자의 무위에서 발현한 겁니다. 그 근원과 차별 짓기 위하여 공자의 사상을 유위니 작위니 비판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공자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들이 그 원조성(originality)을 망각한 채 굳이 다시 거기서 파생된 사상과 차별성을 찾아내려 안달한다는 것이 제 눈에는 코믹하게 비칩니다.
공자의 사상은 그렇게 자잘한 지엽말단에 치우친 사상이 아닙니다. 제자백가의 사상을 아우르는 웅혼한 사상이자 백화제방의 단초가 되는 순정한 사상입니다. 공자사상이 프랑스혁명의 단초가 된 계몽주의라면 노자의 사상은 거기서 파생된 루소의 원초적 자유주의에 가깝고 장자의 사상은 프루동의 아나키즘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그런 사상을 주조한 공자에게 있는 게 아닙니다. 공자를 테제(these)이자 안티테제(antithese)로 삼아 진테제(synthese)를 구축한 노자, 장자 같은 제자백가의 사상가에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사상의 진가인 혁명성을 모르면서 공자의 후예를 자처하며 저마다 자신의 사상으로 전유하기 바삤던 못난 속유들이 문제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