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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Jan 01. 2021

논어는 왜 논어일까?

20편 요왈(堯曰) 제3장

  공자가 말했다.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 예를 알지 못하면 몸 둘 곳이 없다.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     


  子曰 不知命 無以爲君子也. 不知禮 無以立也. 不知言 無以知人也.  

  자왈 부지명 무지어위군자야 부지례 무이입야   부지언 무이지인야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을 ‘백조의 노래’라고 합니다. 논어(論語)의 대단원을 장식하는 이 구절을 저는 ‘백조의 노래’라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논어를 읽었다는 분들 중에 이를 기억하는 이 드뭅니다. 논어를 끝까지 완독한 분이 그만큼 적다는 걸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일 겁니다. 한글로 번역했을 때 그 의미가 확 다가오지 않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듯합니다. 하지만 곰곰이 뜯어보면 참으로 의미심장한 구절이 아닐 수 없습니다.     


  논어, 그 최후의 대목에서 공자는 3가지를 강조합니다. 지명(知命), 지례(知禮). 지언(知言)입니다. 명(命)이 하늘(신 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 맺음에 대한 이해라면 예(禮)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 맺음에 대한 이해일 겁니다. 언(言)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봐야 합니다. 예를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수직적 관계 맺음으로 이해한다면 언은 대등한 인간 간의 수평적 관계 맺음에 대한 이해 수단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지명이 하늘과 사람의 관계 맺음에 대한 이해이고, 지례가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관계 맺음에 대한 이해라면, 지언은 수평적 인간 사이의 관계 맺음에 대한 이해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뭔가 미진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이를 천(天) 지(地) 인(人)의 3재(三才)에 대응시키면서 앎의 주체로서 ‘나’를 대입해봤습니다. 좀 더 입체적 해석의 지평이 열립니다. 지명은 하늘(天)과 나의 관계에 대한 이해이니 곧 하늘이 나에게 준 사명과 한계에 대한 자각을 뜻합니다. 지례는 땅과 나의 관계에 대한 이해이니 곧 지상의 원리를 터득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지례를 모르면 설 곳이 없다고 공간과 연관 지어 표현한 것 아닐까요? 마지막으로 지언은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 대한 이해이니 곧 내가 아닌 타인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뜻합니다. 따라서 지언(知言)은 곧 지인(知人)으로 연결됩니다.     


  이를 좀 더 궁구하면 천(天)은 곧 시(時)니 내가 처한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인식, 곧 ‘시대정신(Zeitgeist)에 대한 이해’를 지명이라 일컬을 수 있습니다. 또 지(地)는 곧 공간이니 내가 처한 공동체의 에토스(관습·풍습)의 터득 곧 ‘지상의 척도에 대한 이해’를 지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문명질서에 대한 이해라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타인(人)에 대한 이해인데 공자는 뜻밖에도 이를 언(言)과 연결 지었습니다. 왜 뜻밖이냐면 논어에는 언어에 대한 불신과 비판이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말은 어눌해도 행동은 민첩한 눌언민행(訥言敏行)을 군자의 덕목으로 꼽았고, 말만 번드르르한 교언영색(巧言令色)을 질색한 사람이 공자 아니었던가요? 그런 공자가 마지막엔 결국 ‘개별적 인간에 대한 이해의 창(窓)’으로서 언어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나선 겁니다.     


  논어라는 책 제목을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말(語)에 대해 논(論)하다’입니다. 더군다나 그 책의 내용은 대부분 ‘공자가 말하기를(子曰)’라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럼에도 책 곳곳에서 말의 무게를 불신하고, 말의 미끄러움을 경멸하고, 말의 한계를 경계하던 공자가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목에서 결국 언어를 모르면 사람을 알 수 없다고 천명한 겁니다.     


  여기서 논어의 드라마틱한 효과가 발생합니다. 논어에서 공자가 희구한 좋은 정치란 결국 소통의 기술이며, 소통은 결국 언어를 통해 이뤄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미심쩍고 불가능해 보이더라도 결코 말을 포기할 수 없으며 포기해선 안된다고 극적으로 강조하고 나선 겁니다. 그래서 저는 공자의 논어야말로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로 끝나는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논고’의 대척점에 서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대목 때문에 이 책의 제목은 공자가 제자들과 논한 이야기를 모았다는 뜻에서 논어이기도 하지만 언어에 대해서 논한 책이란 뜻에서 논어이기도 하다고 전 믿습니다. 또 그렇기에 이 마지막 구절이야말로 논어의 절창이라 주창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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