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시작과 끝

14편 헌문(憲問) 제24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옛날 학자는 자신을 위해 배웠는데 요즘 학자는 남을 위해 배운다.”


子曰: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자왈 고지학자위기 금지학자위인



배움(學)의 목표는 나를 위한 것일까요? 남을 위한 것일까요? 여기에는 단계적 이해가 필요합니다. 군자학에서 배움은 삼라만상의 이치인 도를 터득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덕은 배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내면의 그릇을 확장해가는 수양의 대상입니다. 쉽게 말해 도는 배우는 것이고 덕은 쌓는 것입니다.


배움은 궁금증과 호기심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궁금증과 호기심은 남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 안에서 솟구쳐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배움은 남의 궁금증이 아니라 나의 궁금증을 풀어가는 것이니 곧 ‘남을 위한 것(爲人)’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爲己)’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옛날 학자란 곧 그런 배움의 원리에 충실한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배우고 익히는 사람입니다. 이와 반대로 요즘 학자는 자신에게 충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만족시켜주기 위해서 공부하는 사람입니다. 그럼 여기서 남은 누굴까요?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 스승, 상사, 임금을 말합니다.


따라서 공자의 발언은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스승에게 뿌듯함을 안겨 주기 위해, 상사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그리고 마지막으로 임금에게 충성하기 위해 공부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에는 과거시험이나 오늘날의 고시제도 같은 게 없었습니다. 공부를 잘해 시험을 잘 봐야 출세한다는 것은 과거제도가 도입된 6세기 이후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학문의 출발점이 위인(爲人)이 아니라 위기(爲己)가 돼야 한다는 그 가르침의 효용성은 시간이 갈수록 더욱 커져만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쩌다 공부 열심히 해서 시험 잘 보는 것이 위인을 위한 것으로 변질됐을까요? 주자가 공자의 도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한 자여(증자) 때문입니다. 자여가 집필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효경’ 첫머리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등장합니다. ‘신체의 머리털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감히 손상하지 아니함이 효도의 시작이고, 입신출세하여 도를 행하고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를 드러내는 것이 효도의 마침이다(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立身行道, 揚名於後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자여를 공자의 적통으로 받든 송유(宋儒)는 이를 토대로 과거급제를 사대부의 필요충분조건으로 규정했습니다. 사대부가 공부를 잘하는 것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공자가 자여의 이 말을 들었으면 기겁했을 겁니다. 공부는 위인하기 위함이 아니라 위기하기 위해 하는 것이 돼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공자 자신이었으니까요. 공자가 자여에 대해 “노둔하다”라고 한 것이 결코 폄하의 발언이 아니었음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그렇지만 이런 상상도 하게 됩니다. 공자라면 ‘효경’에 등장하는 자여의 발언을 받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까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나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 학문의 시작이지만 또한 백성의 어려움을 덜어주고 그들을 윤택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학문의 마침이다.”


군자학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입니다. 내 안의 궁금증을 풀기 위해 도를 배우는 것과 내 내면의 그릇을 넓히기 위해 덕을 쌓는 것은 모두 수기(修己)로 귀결됩니다. 나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과정입니다. 군자는 그 단계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자신의 공동체를 더욱 살기 좋게 만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따라서 치인(治人)의 단계까지 감안하면 공부는 곧 남 주기 위해 하는 것이 됩니다. 여기서 남은 부모, 스승, 상사, 임금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백성(民)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단계까지 감안하면 “배워서 남 주자”는 말 또한 공자의 군자학에 부합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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