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가 말하는 문덕(文德)

14편 헌문(憲問) 제18장

by 펭소아

공숙문자의 가신이었던 선(選)이 대부가 되어 공숙문자와 나란히 위나라 조정에서 국사를 논했다. 공자가 이를 듣고 말했다. “문(文)이라는 시호를 받을만하다.”


公叔文子之臣大夫選, 與文子同升諸公. 子聞之, 曰: “可以爲文矣!”

공숙문자지신대부선 여문자동승저공 자문지 왈 가이위문의



공숙문자(公叔文子․본명은 공숙발)는 앞의 장에서 외교를 잘한다고 칭찬받은 공문자(孔文子.공어.중숙어)와 또 다른 위나라의 대부입니다. 둘 다 문(文)이란 시호를 받았지만 공문자는 주로 외교를 전담한 반면 공숙문자는 집정대부로 국정 전반을 책임졌습니다. 위헌공의 손자이니 위령공과 할아버지가 같은 공실의 후손입니다. 그 아버지인 공숙성자(公叔成子․본명은 공숙당․公子當) 때부터 공숙 씨를 쓰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공숙문자는 위령공이 질투할 정도로 부유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믿고 교만하게 굴기보다는 백성을 위해 베풀 줄 알았습니다. ‘예기’ 단궁 하편에는 공숙문자가 죽자 위령공이 '정혜문자(貞惠文子)'라는 시호를 내리며 다음과 같이 설명하는 대목이 등장합니다. “옛날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게 됐을 때 대부가 죽을 쑤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니 어찌 은혜(惠)롭다 하지 않겠는가. 옛날 국난이 있었을 때 대부가 죽음을 무릅쓰고 과인을 호위하였으니 또한 곧지(貞) 않은가. 대부가 위나라의 정치를 맡아 내치와 외치를 두루 이뤄 사직이 욕되지 않게 했으니 또한 빛나지(文) 않은가.” 공숙문자는 공숙정혜문자의 약칭인 것입니다.


이를 통해 문(文)이라는 시호가 '문덕(文德)의 정치'를 펼친 사람에게 붙여지는 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위령공 아래서 의례를 전담하던 축타는 공숙문자가 위령공을 집으로 초청해 만찬을 열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히 경고합니다. “주군은 탐욕스러운데 그대의 부유함을 직접 눈으로 보게 됐으니 화를 자초한 거나 다름없소. 다만 그대는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기에 문제가 없을 것이요. 그러나 그대의 아들인 공숙수(公叔戍))는 교만하기에 장차 망명길에 나서게 될 거요.”


이 경고는 정확하게 맞아 떨어집니다. 축타가 먼저 죽고 공숙문자도 죽은 뒤 공숙수는 위령공에 의해 숙청돼 노나라로 망명합니다. ‘춘추좌전’에는 기원전 496년 봄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기원전 496년은 공자가 천하주유에 나서기 시작한 해입니다. 공자가 그 첫 발걸음으로 위나라로 갔을 때 공숙문자는 이미 고인이 됐고 공숙술은 축출된 이후였을 겁니다.


아마도 그 무렵 공숙문자가 자신의 가신이던 선을 대부로 추천해 나란히 조정에 출사했다는 이야기를 공자가 뒤늦게 듣게 됐을 것입니다. 대부의 가신은 공자와 같은 사인(士人) 계급에 속합니다. 대부의 영지를 관할하는 일을 맡으며 전쟁이 나서 출정하게 되면 대부의 휘하병력을 통솔하는 장교의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런 직속 부하의 재주가 출중함을 알고서 그를 제후에게 추천해 자신과 같은 반열의 대부가 되도록 한 것입니다.

이런 행위가 문(文)이란 시호에 부합한다고 공자가 말한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국사를 책임진 집정대부로서 사심(私心)없이 오로지 공익을 위해 인재를 발탁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 보는 안목이 남다르지 않고서야 평생 자신의 아랫사람으로 있을 사람을 동료 대부로 추천하는 과감함을 보일 수 없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신분이 아니라 능력으로 평가하고 또 국익을 위해서 사심 없이 행동하는 것. 공자가 말한 문덕(文德)은 이렇게 글(文)을 읽고 깨달은 바를 다른 사람을 위해 베풀어 빛을 발하는 것(文) 아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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