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시대 최고의 성공신화 관중

14편 헌문(憲問) 제17장

by 펭소아

자공이 말했다. “관중은 어진 사람이 아니겠지요? 제환공이 공자 규를 죽였을 때 따라 죽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환공의 재상이 됐으니까요.”

공자가 말했다. “관중은 제환공을 보필하여 제후들의 패자(覇者)로 옹립했고, 한차례 천하를 바로잡았다. 그래서 백성이 지금까지도 그 은혜를 입고 있다. 만약 관중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오랑캐의 풍습을 받아들여)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섶을 왼쪽으로 여미었으리라. 그의 처신을 어찌 작은 신의를 지키겠다고 도랑에서 스스로 목을 매어 죽어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평범한 백성의 처신과 비견할 수 있겠느냐?”


子貢曰: “管仲非仁者與? 桓公殺公子糾, 不能死又相之.”

자공왈 관중비인자여 환공살공자규 불능사우상지

子曰: “管仲相桓公覇諸侯, 一匡天下. 民到于今受其賜.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자왈 관중상환공패제후 일광천하 민도우금수기사 미관중 오기피발좌임의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

기약필부필부지위량야 자경어구독이막지지야



춘추시대 인물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공자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단연 관중(본명 관이오)이었습니다. 포숙아와 비범한 우정을 상징하는 관포지교(管鮑之交)의 주인공이자 제(齊)나라의 환공(桓公)을 춘추오패의 첫 번째 패자로 등극케 해 명신현상(名臣賢相)의 대명사가 된 인물입니다.


공자보다 대략 120년 전 인물인 관중은 소위 인생역전 성공신화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이를 면하려고 포숙아와 함께 장사를 하면서도 약삭빠르다는 소리를 듣더라도 더 많은 돈을 챙겨가야 했습니다. 또 주군으로 선택한 공자 강규가 이복동생인 강소백(훗날의 제환공)에게 밀려 망명지인 노나라에서 살해되면서 패가망신의 위기에 처합니다. 함께 강규를 모시던 소홀(召忽)은 주군을 따라 죽었지만 관중은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하고 제나라로 소환돼 제환공의 처분만 기다리는 신세가 됩니다. 관중은 과거 주군으로 모시던 강규의 라이벌 강소백을 몰래 활로 쏴서 거의 죽일 뻔했던 인물이었기에 그의 목숨은 풍전등화나 다름없었습니다. 하지만 강소백을 모시던 친구 포숙아의 강력한 추천으로 제환공과 독대한 뒤 그의 재상으로 발탁되면서 엄청난 반전의 인생을 살게 됩니다.


관중은 북방에 위치한 연(燕)나라가 북방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 곤경에 처했을 때 제환공이 여러 제후를 규합해 오랑캐를 물리치도록 해 중화문명을 지켜냈습니다. 또 남방의 대국인 초나라 제후가 스스로 왕을 자칭하며 주나라 중심의 종법질서에서 이탈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제환공으로 하여금 초나라 원정에 나서게 함으로써 주왕실에 조공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받아냅니다. 이로 인해 제환공은 ‘구합제후, 일광천하(九合諸侯 一匡天下)’라는 찬사를 받게 되니 ‘아홉 번 제후들을 규합하고 크게 한번 천하를 바로잡았다’는 뜻입니다.


관중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엇갈리는 면이 있습니다. 3편 ‘팔일’ 제22장에서는 관중이 사람됨의 그릇이 작았으며 나중에는 교만해져서 제후라도 되는 양 사치를 부렸으니 예를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헌문' 편에서는 3장에 걸쳐 관중이 작은 굴욕을 참아냈기에 하은주 삼대의 문명질서를 지켜낼 수 있었으며 그 과정에서도 공명정대하였다고 상찬합니다.


반면 공자의 적통임을 자부하는 맹자와 주자의 관중 평가는 매우 박합니다. 예로써 통치하지 않고 법으로써 이를 강제했으며 장사꾼처럼 국익에 따라 행동했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사농공상의 계급질서에 입각해 이속을 우선시하는 상인의 정신을 지녔다고 경멸하고 훗날 진신황이 택한 부국강병 노선의 창시자 꼴이라 하여 미워했던 것입니다. 공자가 들었으면 책상머리에만 앉아서 세상을 읽어낸 철부지의 투정 어린 탁상공론이라고 앙천대소했을 내용입니다.


공자는 훗날 유가에서 상정한 사농공상의 계급적 질서에 반대했을 사람입니다. 누구든 육포 한 묶음만 들고 오면 가르침을 주는 교육혁명을 통해 고루한 신분질서를 혁파하려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 관중에 대해 질문한 자공은 훗날 스승이 돌아가시자 부모상일 경우 3년상을 지키라 한 스승의 가르침에 2배를 더해 6년상을 지킨 사람입니다. 당시 공자 제자들 대부분은 3년간 스승의 묘소를 지켰고 이후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 공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학당을 열었습니다. 그 기반이 되어준 것이 장사로 큰돈을 번 자공의 재력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럼 그 자공은 그 돈을 어떻게 벌었을까요? 장사로 번 것입니다. 만일 공자가 장사꾼을 싫어했다면 스승의 가르침에 가장 충실했던 제자가 과연 그 길을 걸었을까요?


공자는 목적이 수단을 합리화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았지만 과정만큼이나 결과도 중시한 사람이었습니다. '팔일' 편에서 말했듯이 관중은 상경의 위치에 있으면서 마치 제후처럼 행동했으니 예를 제대로 몰랐던 사람이라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일 관중이 없었다면 주공이 확립한 예(禮) 자체가 사라질 수 있었음을 공자는 결코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천하주유 기간 광 땅에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을 때 이렇게 외쳤습니다. “문왕은 이 세상에 없지만 그 문(文)은 이 몸에 있지 않은가? 하늘이 문을 버리시지 않은 한 그 문이 깃든 나를 없애지 않으실 것이로다!” 여기서 공자가 말하는 문은 곧 예와 상통하니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문명 질서이자 인륜 질서를 뜻합니다. 천명(天命)으로 표현되는 시대정신을 지녔던 공자는 자신이 그 문과 예의 계승자이자 수호자여야 한다는 사명의식이 뚜렷한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그 횃불이 자신에게까지 전해지도록 한 관중에게 일종의 계승의식 내지 연대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맹자와 주자에게 결여된 역사의식입니다.


그만큼 공자는 균형 감각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균형감각은 요즘 말로 하면 자존감의 산물이었습니다. 공자는 사람들이 뭐라고 평가하든 자신의 관점을 지키려 했다는 점에서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드문 독립적 지식인이었습니다. '팔일' 편에선 사람들이 너도나도 관중을 높이 평가하자 일부러 관중에게도 허물이 있고 약점이 있음을 지적한 것입니다. '헌문' 편에선 평소 어짊을 강조해온 공자의 관점에 입각해 관중을 비판하자 이번엔 반대로 부인할 수 없는 관중의 위대함을 얘기한 것입니다.


이를 제대로 모르기에 공자는 스스로 일이관지(一以貫之)하다고 하면서 여기서 한 말과 저기서 한 말이 다르다고 비판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공자의 프로네시스(실천적 지혜)는 중용(中庸)을 추구합니다. 중용은 균형의 지혜를 말합니다. 균형의 지혜라는 말은 언제 어디서나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진리가 아니라 천지인(天地人), 곧 시간, 공간, 인간에 맞춰 그 중심점이 이동하며 천변만화하는 지혜입니다. 그걸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세상에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다고 믿는 교조주의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증자, 맹자, 주자, 이 삼자(三子)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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