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부의 의리 vs. 선비의 의리

14편 헌문(憲問) 제16장

by 펭소아

자로가 말했다. “제나라 환공이 그 형인 공자 규를 죽이자 소홀은 자살했지만 관중은 따라 죽지 않았습니다. 이는 어질지 않은 것이겠지요?”

공자가 말했다. “환공이 아홉 차례 제후를 규합할 때 병력과 전차를 동원하지 않은 것은 관중의 역량이었다. 그것이 어짊이지, 그것이 어짊이야.”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 “未仁乎?”

자로왈 환공살공자규 소홀사지 관중불사 왈 미인호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

자왈 환공구합제후 불이병거 관중지력야 여기인 여기인



관중에 대해 자공에 이어 자로가 질문합니다. 자공과 자로 두 사람은 인격 도야에 중점을 둔 수제학보다는 지도력 함양을 중시하는 치평학에 능한 인물입니다. 관중은 수제를 통해 덕을 높이 쌓은 인물이라기보다는 치평의 능력이 탁월했던 사람으로 봐야할 것입니다. 치평파의 관점에선 군자라 불러 마땅한 인물이지만 수제파의 관점에서 보면 뭔가 아쉬운 점이 엿보입니다. 그래서 자공과 자로가 “관중도 과연 어질다 하고 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계속 던지는 것입니다. 어짊은 수제와 치평, 덕과 도의 결합을 통해 형성되는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여동생 애강과 근친상간이 들통나자 그 남편인 노환공을 암살했던 제양공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로부터 8년 뒤인 기원전 686년 제양공이 부하들에 의해 비참하게 시해당합니다. 그 사촌동생인 강무지(공손 무지)가 권좌를 꿰차고 제양공의 두 동생은 이웃나라로 망명을 떠납니다. 노나라로 도망간 강규(공자 규)와 거(筥)나라로 숨은 강소백(제환공)입니다. 1년도 못돼 강무지가 다시 암살당하자 두 형제 중 제나라 수도 임치에 누가 먼저 도착하느냐가 중요해집니다.


이때 관중은 꾀를 내어 강소백이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활을 쏴서 강소백을 맞힙니다.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진 강소백은 다행히 허리띠에 맞아 목숨을 거졌지만 죽은 척 연기를 합니다. 관중은 쾌재를 불렀고 강규 일행은 강소백이 죽은 줄 알고 여유를 부리며 천천히 임치로 들어갔다가 강소백이 멀쩡히 살아 권좌를 꿰찼음을 발견하고 노나라로 되돌아가게 됩니다.


당시 노나라 제후였던 노장공은 제환공을 쫓아내고 노나라 보호 하에 있던 강규를 제후로 삼고자 군사를 일으키지만 포숙아가 이끄는 제나라 군대에 완패합니다. 제환공이 패한 노장공에게 최후통첩의 편지를 보냅니다. 자신의 손으로 형을 죽일 수 없는 노릇이므로 노장공더러 강규의 목숨을 앗고 그의 모사(謀士)인 소홀과 관중은 자신이 직접 죽일 터이니 산채로 넘길 것을 요구합니다. 노장공이 그에 따라 강규를 처형하자 소흘은 주군을 따라서 자진합니다. 하지만 관중은 죽지 않고 포승줄에 묶여 제나라로 압송되는 길을 택합니다.


한때 자신이 거의 죽일 뻔했던 적의 두목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긴 것이니 호랑이를 잡기 위해 호랑이굴에 뛰어든 거나 다름없었습니다. 실제 노장공에게 보낸 제환공의 편지에는 ‘소홀과 관중을 죽여서 젓갈을 담그겠다’는 무시무시한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관중에게도 믿는 구석은 있었습니다.그를 압송해 가는 포숙아가 관포지교로 유명한 베스트 프렌드였으니까요..


실제 포숙아는 “주군이 제나라 하나만 거느리실 생각이라면 고혜(高傒․당시 제나라의 상경)와 저 숙아 두 사람으로 충분하지만 천하의 패왕(覇王)가 되고자 하신다면 관이오(管夷吾․관중의 본명)가 없어선 안 됩니다. 결코 그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라는 편지로 이미 제환공의 마음을 돌려둔 상태였습니다. 제환공은 포로가 돼 끌려온 관중을 버선발로 반겼고 지극한 환대로 자신의 사람으로 삼은 덕에 춘추오패 중 첫 번째 패자로 불리게 됩니다.


‘사기’에는 이에 대한 관중의 말도 전하고 있습니다. “공자 규가 보위를 놓고 다투다가 패하자 소홀은 죽고 나는 붙잡혀 굴욕을 당했을 때도 포숙은 나를 수치도 모르는 자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사소한 일에는 수치를 느끼지 않으니 천하에 공명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를 낳아 준 사람은 부모이나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이다.”


우직함을 자랑하는 자로는 관중이 주군에 대한 의리를 끝까지 지키지 않은 것이 가장 큰 불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주군이 죽을 때 따라 죽지 않았으니 어질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니냐는 의견을 피력합니다. 하지만 공자는 후대의 유학자들처럼 고루하게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고 그걸 바로 잡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 사람입니다.


관중은 강규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강규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강규를 죽인 제환공의 손을 잡고 제나라를 중원 최고의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제나라가 패권국가가 되는 데 있어 관중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40년 뒤 관중이 죽고 난 뒤 밝혀집니다. 관중을 잃은 제환공은 2년 만에 수조, 역아, 위개방 3명의 총신에게 농락당하다가 병상에서 굶어 죽습니다. 심지어 죽고나서도 67일간 장례를 치르지 못해 구더기가 들끓는 오욕을 겪게 됩니다. 이후 제나라는 혼란에 빠져 다시는 패국(覇國)의 위상을 못 찾게 됩니다.


관중이 재상이 됐을 때 남긴 말이 ‘사기’에 나옵니다. “백성들은 곡식창고가 가득 차야만 예절을 알고, 의식이 풍족해야만 영욕(榮辱)을 알게 된다. 군주가 법도를 준수하면 육친(六親․부모형제처자)이 굳게 단결하게 되고, 사유(四維․예의염치)가 해이해지면 나라가 망하게 된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민심에 순응하는 정령(政令)을 내려야 기강이 바로 선다.”


이는 유가에서 말하는 좋은 정치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공자는 먼저 양식을 풍족하게 해 주고, 군대를 든든히 하고, 군주를 믿게 만들어야 좋은 정치가 이뤄진다고 강조했습니다. 또 곧은 사람을 등용하고 굽은 사람을 버리면 백성이 복종한다고 밝혔습니다. 맹자 또한 백성의 먹고사는 문제인 항산(恒産)을 먼저 해결해야 비로소 예의염치의 문제인 항싱(恒心)이 깃들게 된다고 강조했습니다. 맹자가 말한 인의예지의 사단(四端)은 관중이 말한 사유(四維)의 변형이라 봐도 무방합니다.


공자는 관중이 이룩한 성과를 토대로 그가 어질다고 높게 평가한 것입니다. 하지만 맹자는 관중이 말한 내용과 대동소이한 것을 주장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탐탁지 못한 점이 있다 하여 그 성과마저 얕잡아 봤습니다. 두 사람 다 관중의 성공사례를 자신의 당대에 실현시키겠다며 천하를 주유했지만 결국 그걸 실천에 옮기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 처지에서 관중의 이룬 성과의 눈부심을 인정한 공자와 ‘못 먹는 감 찔러나 본다’는 심보라 할만큼 관중을 폄하한 맹자 중에 군자는 누구이고 소인은 누구일가요?


공자는 관중에 대해 하나를 더 높이 샀습니다. 제나라를 패국으로 만듦에 있어 무력 사용을 자제하고 문덕(文德)과 예치(禮治)를 앞세운 것입니다. 제환공이 북방의 연나라를 침략하는 오랑캐와 맞서거나 주나라 중심의 연방체제를 깨려 한 남방의 초나라를 징치하려 할 때 존왕양이(存王攘夷)의 기치를 높이 올리며 대의명분을 앞세웠습니다. 그래서 여러 제후의 회맹을 주관할 때도 천자(주왕․周王)가 있는 곳을 향해 먼저 배례(拜禮)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초나라를 굴복시키려 연합군을 일으켰을 때도 직접적 무력충돌은 되도록 자제했습니다. 천하의 백성이 죽거나 다치는 일을 막으면서 도리에 부합하는 정치를 펼친 것입니다. 공자가 강조한 어진 정치의 모범이라 할만했던 것입니다.


자로는 공자 제자 중에 의(義)와 용(勇)을 가장 좋아했습니다. 관중이 어질지 못한 것 아니냐 생각한 것 역시 첫 주군이었던 강규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않았다고 생각해서였을 겁니다. 공자는 이를 읽어냈습니다. 그래서 병거(兵車)를 쓰지 않고 제후들을 규합한 것을 꼭 집어 말하며 그것이야말로 어짊의 핵심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또한 이를 통해 군주와 신하 간의 의리는 필부의 의리에 불과하며 천하의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는 공익을 위한 의리가 군자가 지켜야 할 큰 의리라는 점을 일깨워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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