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만큼 파란만장했던 진문공

14편 헌문(憲問) 제15장

by 펭소아

공자가 말했다. “진문공은 속임수를 쓰고 바르지 않았으나, 제환공은 공정했고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子曰: “晋文公譎而不正, 齊桓公正而不譎.”

자왈 진문공휼이불정 제환공정이불휼



진문공(晋文公․본명 희중이)은 제환공의 뒤를 이어 춘추오패의 두 번째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춘추오패가 누구냐를 두고도 의견이 갈리자만 제환공과 진문공이 빠지는 법이 없을 정도로 그 존재감이 뚜렷한 제후였습니다. 그럼에도 재위 기간이 8년에 불과한 데다 패자로 불리고 2년여 만에 숨졌기에 재위 기간이 43년에 이르렀던 제환공에 비하면 아무래도 그 무게감이 떨어집니다.


다만 19년간 망명생활을 하며 인동초의 세월을 보내다 예순둘의 나이에 극적으로 제후가 됐습니다. 그리고 ‘준비된 제후’로서 짧지만 굵은 회광반조(回光返照)의 통치를 펼칩니다. 그로 인해 제환공의 스토리에 관중의 스토리가 더해진 것 같은 극적 효과를 낳았습니다. 훗날 불우한 시기를 겪어던 무수한 제왕지기(帝王之器)에게 희망의 등불 같은 존재가 된 이유입니다.


헌데 이런 진문공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매우 박합니다. 원문의 휼(譎)은 속인다는 뜻으로 뱃속이 시커먼 사람에게 쓰는 표현입니다. 배다른 형을 죽이고 제후가 됐고 말년에는 3명의 총신에게 농락당하다 비참하게 죽은 제환공에게는 공정(公正)이란 표현을 쓰면서 제환공보다 더 힘든 고초를 겪은 진문공에겐 왜 아류(亞流)라는 표현을 넘어 부정(不正)하다고 평한 것일까요?


진문공의 삶을 돌아보면 공자와 비슷한 대목이 많습니다. 공자가 14년간 국외를 떠돌며 상갓집 개라는 소리까지 들었다면 진문공은 19년의 망명생활을 하면서 굶주렸을 때 먹을 것으로 진흙덩이까지 받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빈궁한 처지에서도 원칙과 위엄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또 남방의 강대국인 초나라에 몸을 의탁할 때 북방의 강대국인인 진(晉)나라의 국익을 양보하지 않으려는 당당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진나라 제후가 됐을 땐 집요하게 대가를 요구한 초성왕에게 이렇게 응대했습니다. “훗날 두 나라에 전쟁이 벌어지면 제가 왕께 90리(3일 여정)를 양보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도 왕의 관용을 얻지 못한다면 저는 하는 수 없이 왼손에는 채찍과 활을 쥐고 오른쪽에는 활집을 매고 왕과 한바탕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90리는 물러나 주겠지만 계속 도발해온다면 응전할 수밖에 없다고 못을 박았는데 실제 진나라 제후가 된 뒤 초나라와 벌어진 ‘성복(城濮)전투’에서 이 약속을 지킵니다.


진문공은 아버지 진헌공(晉憲公․희궤제)과 친동생인 진혜공(晉惠公․희이오)이 밀파한 살수(殺手)의 공격을 여러 차례 받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 인간사냥꾼의 이름이 사인피(寺人披)였습니다. 진문공이 제후의 지위에 올라 얼마 안 됐을 때 궁성에 불을 지르고 진문공을 시해하려는 역모가 벌어졌습니다. 사인피는 그 정보를 입수하고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제환공과 관중의 예를 언급하며 진문공에게 독대를 청합니다. 20년간 자기 목숨을 노린 살수였으니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싫었을까요? 하지만 진 문공은 그를 만나줬고 그 덕에 역모를 진압한 뒤 사인피를 중용합니다. 역시 잠시 중용했다가 배신하는 속임수도 쓰지 않았습니다.


진문공이 진실되다는 점은 그의 친동생인 진혜공과 그 아들인 진회공(晉懷公‧희어) 부자의 사례와 비교할 때 더욱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진문공이 되는 희중이과 진혜공이 되는 희이오는 진헌공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적장자인 희신생이 태자였습니다. 문제는 아버지 진헌공이 총애한 애첩 여희가 뒤늦게 희해제라는 늦둥이 아들을 낳고 벌어집니다. 희해제를 진헌공의 후계자로 삼고픈 여희의 모함으로 기원전 656년 희신생은 자결했고, 다음 해엔 희중이, 그다음 해엔 희이오가 살해위협을 받은 끝에 국외로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기원전 651년 진헌공이 숨지고 여희의 아들 희해제가 11살에 재위에 오르지만 얼마 못가 암살당하면서 후계를 둘러싼 궁중암투가 계속됩니다. 결국 이웃나라에 망명 중이던 희중이과 희이오가 유력한 후계자로 떠오릅니다. 희중이는 국내 암투 세력의 꼭두각시 신세가 될까 저어하여 이를 거절합니다. 반면 희이오는 자신의 매부이자 서방의 강대국인 진(秦)나라의 제후인 목공(영임호)에게 5개 성을 떼어주겠는 약속어음을 내주고 진군(秦軍)의 호위 아래 귀국해 먼저 제후(진혜공)의 자리에 오릅니다.


진목공은 희중이의 매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희중이는 자신이 제후가 되기 위해 국익을 해치는 일에 가담할 순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약삭빠르게 주판알을 퉁긴 진혜공이 머리회전은 더 빨랐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진혜공 부자에게는 거짓말쟁이의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진혜공은 일단 제후가 되자 진목공과 약속을 저버렸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진나라에 가뭄이 들자 진목공에게 손을 벌려 곡식을 지원받아 놓고선 반대로 다음 해 진목공의 진나라에 흉년이 들어 곡식 지원을 요청받자 ‘기회는 이때다’라며 침략전쟁을 벌입니다. 배은망덕(背恩忘德)이 따로 없습니다.


그러나 진혜공은 결국 노회한 진목공에게 처절한 패배를 맛보고 포로 신세가 됩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이 따로 없습니다. 진목공은 이번에도 너그럽게 진혜공의 태자인 희어를 인질로 삼고, 예전에 약속했던 5개의 성을 돌려받는 대가로 진혜공을 풀어줍니다. 뿐만 아니라 인질인 희어에게 자신의 딸인 회영(懷嬴)을 짝지어줍니다.


하지만 이번엔 부전자전(父傳子傳)의 배은망덕 사태가 벌어집니다. 아버지 진혜공이 병이 들어 위중해지자 계승권을 놓칠까 불안했던 희어는 아내인 회영을 버려두고 홀로 진(晉)나라로 돌아가 제후(진회공)의 자리에 오릅니다. 상황이 급박해 어쩔 수 없는 단독 플레이였다면 제후의 자리에 오른 뒤 회영을 정비로 삼아 데려온다면 충분히 양해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진회공은 이를 차일피일 미루기만 합니다.


부자 이대(父子 二代)에게 뒤통수를 맞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진목공이 회심의 복수혈전에 착수합니다. 동생과 조카가 잇따라 제후 자리를 꿰차는 것을 멀뚱멀뚱 구경만 해야 했던 또 다른 처남 희중이에게 회영을 아내로 맞으면 군사력을 동원해 진(晉)의 제후가 되게 도와주겠다고 제안한 것입니다. 진중하던 과거의 희중이었다면 조카의 여인을 차마 아내로 삼을 수 없어 그 제안을 거절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예순이 넘었던 그에겐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개인적 명성에 금이 가는 일일뿐 국익을 훼손하는 일이 아니니 이번 한 번만 파격을 단행하자는 생각도 했을 겁니다. 그리하여 조카의 아내와 혼인을 하고 진목공과 나란히 군대를 몰고 고국으로 쳐들어가 조카인 진회공을 몰아내고 제후의 자리에 앉게 된 것입니다.


그럼 공자가 휼과 부정이란 표현을 쓴 것이 이를 염두에 둔 것일까요? 아닙니다. 관중의 사례에서처럼 권력쟁취 과정에서 다소 의리에 어긋난 행동이 있더라도 결과가 공익에 부합했다면 어질다고 말한 사람이 공자입니다. 더군다나 제후가 된 이후 회영을 내치거나 박대하지 않았으니 속임수를 썼다고 할 수 없습니다. 진혜공과 진회공 부자의 사례에 비춰보면 오히려 신의가 있다 박수 받을 만합니다. 그의 시호에 글월 문(文)이 들어간 것 또한 그가 그만큼 원칙과 약속에 충실한 사람이었기에 붙여진 것입니다.


공자가 분개한 것은 진문공이 패자가 된 이후의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진문공은 즉위한 첫해인 기원전 636년 춘추시대 천자의 나라인 주나라 내부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존왕양이'의 기치 아래 반란세력을 무찌르고 주나라의 양왕을 호송해 복위를 도왔습니다. 이로 인해 ‘제환공의 재림’이란 칭송을 들었습니다. 또 기원전 632년 남방의 강대국 초나라와 성복전투에서 승리한 뒤 전리품으로 얻은 '천토(踐土)'라는 땅에 양왕을 위해 새로운 왕궁을 짓고 제후의 회맹을 주도합니다. 이때 양왕에게 초나라 포로와 전리품 그리고 땅을 바쳐 제후의 패자(覇者)로 공인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해 겨울 온(溫) 땅에서 다시 제후들의 회맹을 주최하면서 양왕을 들러리로 불러다 놓고 함께 사냥을 벌입니다. 이것은 당시 주나라의 종법질서에 어긋나는 것이었으니 천자가 제후를 부를 순 있어도 제후가 천자를 부를 순 없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이 때문에 격노했고 ‘춘추’에서 이 사건을 다루면서 ‘진나라, 송나라, 채나라, 정나라, 진나라, 거나라, 주나라, 진나라의 제후들과 온(溫)에 모여 회담을 가졌다. 왕은 하양(河陽)에서 사냥을 했다’라고 적었습니다. 온과 하양은 똑같이 강의 북쪽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마도 양자강 이북의 동일지역에 대한 이칭으로 보이는데 일부러 지명을 달리해 같은 공간으로 비치지 않게 하면서 제후의 회맹과 왕의 사냥이 우연의 일치인 것처럼 기록한 것입니다.


공자는 진문공이 천하 백성의 평안과 도의를 지키기 위해서 존왕양이의 기치를 든 것이 아니라 주나라 왕을 옆에 끼고 호가호위(狐假虎威)하려 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기간은 다르지만 외형적으로 제환공과 비슷한 역할을 했던 진문공을 가혹하게 비판한 것입니다. 제환공과 진문공의 마음을 읽어낼 길이 없으니 과연 두 사람의 속내가 그리 엇갈렸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행태에는 분명 차이가 존재했습니다. 또 뒤로 갈수록 그 차이는 더욱 커졌습니다.


그나마 춘추오패 중 '존왕양이'를 표방한 제후는 제환공과 진문공 딱 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패자들에겐 제후의 회맹에서 누가 맹주 자리에 앉느냐가 더 중요했을 뿐 천자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공자는 그 분기점이 제환공과 진문공 사이에서 발생했음을 예리하게 포착한 것입니다. 동시대인들이 춘추오패를 상찬하기 바쁠 때 그 질적 차이를 꿰뚫어 본 것이니 역시 탁견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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