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편 헌문(憲問) 제14장
공자가 말했다. “장무중이 방(防)지역을 담보 삼아 (자신을 대신할) 가문의 후계자를 노나라에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비록 임금을 겁박하지 않았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 말을 믿지 않는다.”
子曰: “臧武仲以防求爲後於魯, 雖曰不要君, 吾不信也.”
자왈 장무중이방구위후어노 수왈불요군 오불신야
장무중(본명 장손흘․臧孫紇)은 ‘삼불인 삼부지 삼불후’(15편 위령공(衛靈公) 제14장)편의 주인공이었던 장문중의 손자입니다. 대대로 법무장관에 해당하는 사구(司寇)의 벼슬을 도맡은 장(藏) 씨 가문의 6대 종주였습니다. 그 덕과 공, 말이 썩지 않을 삼불후로 칭송 받은 장문중에게는 비판적이었던 공자는 오히려 그 손자인 장무중의 지혜로움은 인정했습니다(14편 ‘헌문’ 제12장).
실제 ‘춘추좌전’을 보면 장무중의 안목이나 언변이 날카로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여럿 등장합니다. 신하들에게 쫓겨나 제나라에 망명 중이던 위헌공을 만나본 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말이 거칠어서 복위하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가 위헌공을 모시던 위나라 대부 자전과 자선을 만나 대화를 나눈 뒤 “저런 신하가 앞에서 끌고 뒤에서 밀어주니 위 제후는 다시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실제 위헌공은 오랜 절치부심 끝에 복위에 성공하게 됩니다.
또 노나라의 집정대부인 계무자가 "사구의 직에 있는 사람이 도적이 들끓는데 뭐하고 있는 것이냐"고 장무중을 타박하자 이렇게 받아칩니다. “나라의 정경이라는 사람이 외국에서 들어온 큰 도둑을 환영했으니 내가 어찌 작은 도둑을 단속할 수 있겠습니까?” 계무자가 약소국인 주(邾)나라의 대부가 자신의 영지와 백성을 데리고 귀순한 것을 대환영한 것을 맞비판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장무중은 노나라 최대 족벌세력인 삼환이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매서운 비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장무중은 삼환 씨 가문의 차기 종주를 정할 때도 일종의 킹메이커 역할을 했습니다. 그로 인해 종주 자리에서 밀려난 이들의 미움도 샀습니다. 그러다 결국 공자가 태어나기 1년 전인 기원전 550년 삼환세력의 협공을 받고 외국으로 망명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해에 장무중과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맹손 씨의 6대 종주 맹장자가 숨을 거둡니다. 장무중은 그런 맹장자의 빈소에서 대성통곡을 합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맹장자는 그대를 미워했는데도 이토록 슬퍼하니 만일 (그대를 총애하는) 계무자가 숨지면 얼마나 슬퍼하려고 그러는가?”라고 이죽거리듯 묻습니다. 장무중은 이렇게 답합니다. “계무자가 나를 예뻐하는 것은 고통이 따르지 않는 질병과 같고 맹장자가 나를 미워한 것은 쓴 약과 같소. 쓴 약은 나를 살리지만 아픔 없는 질병은 결국 나를 해쳐 재앙을 가져옵니다. 맹장자가 죽었으니 내가 망할 날이 얼만 남지 않았습니다.”
맹장자는 적자 없이 서자만 뒀는데 서장자인 맹손질이 아니라 그 동생인 맹손갈(맹효백)이 종주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이때 계무자의 서장자 공서의 도움을 받습니다. 공서는 장무중 때문에 종주 계승권을 뺏겼다는 생각에 장무중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습니다. 맹효백과 공서는 힘을 합쳐서 장무중이 난을 일으키려 한다고 비방합니다. 처음엔 계무자가 이를 무시했습니다. 그러자 맹손 씩 가문은 맹장자의 묘역 조성을 도와달라며 장씨 가문에 일손을 청합니다. 맹손씨 가문을 경계한 장무중이 군사를 대동하고 공사현장에 나타납니다. 맹효백은 이를 빌미삼아 다시 장무중이 난을 획책한다고 다시 무고했고 계무자도 대노해 급기야 장씨 가문에 대한 공격을 명합니다.
진퇴양난에 처한 장무중은 일단 노나라 수도 임치의 성문을 부수고 자신의 외가가 있는 주(鑄)나라로 도피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노나라로 복귀하기 어렵다는 판단 아래 다시 장씨 문중의 봉지인 방(防) 땅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자신의 배다른 형인 장손위(臧孫爲)를 장씨 문중의 후계자로 인정해달라는 청원을 보냅니다. 자신을 쳐내더라도 가문은 존속시켜달라는 청원이었지만 청원을 들어주지 않으면 방 땅을 제나라에 바치겠다는 은근한 협박이 숨어있었습니다. 계무자는 이를 받아들였고 장무중은 제나라로 망명을 떠났으나 거기서도 제장공의 눈 밖에 나 결국 금의환향에 실패하고 맙니다.
공자는 장씨 가문의 종주 중에서 장무중이 가장 지혜롭고 기개가 있다고 봤습니다. 그가 망명을 떠난 것도 삼환 세력에게 쉬이 부하뇌동하지 않고 비판세력으로 남고자 했기 때문임을 꿰뚫어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장무중이 너무 자신의 재주만 믿고 함부로 세치 혀를 놀리다가 적을 너무 많이 만들어 화를 자초했다고 봤습니다. 심정적으로는 장무중에게 동조했지만 민심을 붙잡기 위해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태도가 아쉬웠다는 점에서 일종의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똑똑하기만 했을 뿐 어질지 못했던 것입니다.
‘춘추좌전’ 노양공 23년조에 실린 장무중에 대한 공자의 평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지혜로움만으로는 어려움이 있다. 장무중의 지혜가 노나라에서 용납되지 못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의 행위가 작위적인 데가 있었고 억울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고 베푸는 마음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공자가 지혜로움 보다 어짊을 더욱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