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편 헌문(憲問) 제9장
어떤 사람이 자산(子産)에 대해서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자비로운 사람이다.”
자서(子西)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그 사람 말인가? 그 사람 말인가?”
관중에 대해 묻자 공자가 말했다. “인물이다. 백씨(伯氏)의 병읍 삼백 호를 몰수했는데 백씨는 거친 밥을 먹으면서도 죽을 때까지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或問子産. 子曰: “惠人也.”
혹문자산 자왈 혜인야
問子西, 曰: “彼哉彼哉?”
문자서 왈 피재피재
問管仲. 曰: “人也. 奪伯氏騈邑三百, 飯疏食, 沒齒無怨言.”
문관중 왈 인야 탈백씨병읍삼백 반소사 몰치무원언
3명의 인물이 등장합니다. 정나라의 재상으로 공자가 역할 모델로 삼았던 자산(子産․본명은 공손교․公孫僑), 초나라의 영윤(재상)이었던 자서(子西․본명은 미신․羋申) 그리고 춘추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 관중(본명은 관아재)입니다. 세 명 다 해당 나라를 대표하는 명재상이라 할 만합니다.
자산에 대해선 말할 것도 없이 널리 은혜를 베푼 사람이라는 찬사가 돌아갑니다. 여기서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기원전 536년 자산은 정나라의 법조문을 새겨 넣은 청동 세발솥(鼎)을 주조해 춘추시대 최초의 법령 명문화를 시작했습니다. 진(晉)나라 대부인 숙향(叔向)이 이를 정면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무릇 정치는 덕과 믿음, 어짊에 의거해야 하는데 법제로 못을 박는 바람에 백성들 마음에 자신들은 법망을 피하면서 상대는 법으로 옭아매려는 쟁심(爭心)을 불러일으키는 화를 저질렀다고 비판하고 나섰습니다. 한마디로 덕치(德治)를 버리고 법치(法治)를 취했다는 비판입니다. 훗날 송유의 관중, 순자, 한비자 비판과 궤를 같이 합니다. 하지만 결국 진(晉)나라 역시 법령을 명문화했고 대부분의 나라가 이를 쫓았습니다.
그럼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는 어땠을까요? 이를 직접 문제 삼은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 행실은 공손하고(恭), 윗사람을 섬김에 정성을 다하고(敬), 백성을 돌봄에 있어선 은혜롭고(惠), 백성을 부림에 있어선 의롭다(義)”면서 군자의 도(道) 4가지를 갖추고 있다고 칭송했습니다(4편 ‘공야장’ 제16장). 다만 공자가 편집한 ‘춘추’에서 법령을 명문화한 것에 대한 숙향의 비판을 상세히 소개하면서 또 다른 진나라 대부 사문백(士文伯)의 입을 빌려 “불로써 형기(刑器)를 주조한 것은 훗날 화성(火星․불길한 기운)이 출현할 때 정나라에 큰 불이 일어날 불씨를 심어 둔 것과 같다”고 우회적 비판의 글을 남겼을 뿐입니다(노소공 6년조).
주나라 이후 확립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예(禮)는 서민에게까지 내려가지 않고, 형(刑)은 대부에게까지 올라가지 않는다(禮不下庶人 刑不上大夫)’입니다. 다시 말하면 귀족에겐 예치를 적용하고, 일반 백성에겐 법치를 적용한다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예치란 암묵적으로 합의된 에티켓을 지키는 한 가혹하게 처벌하지 않는 것입니다. 반면 법치란 법을 어겼을 때 예외 없이 엄하게 처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공경대부에겐 예치를 적용해 느슨하게 다스리고 일반 백성에겐 법치를 적용해 엄격히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가가 예치를 일반 백성에게도 공평히 적용할 것을 주창한다면 법가는 법치를 귀족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해야 함을 역설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법가가 등장한 이후 이항대립적 사고에 입각한 변별법일 뿐입니다. 법가가 등장하기 전 공자의 프로네시스(실천이성)에 입각해 바라보면 공자가 말하는 예(禮)는 덕치와 법치를 포괄하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공자에게 예는 법과 관행, 제도 일반을 통칭하는 ‘지상의 척도’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가능한 덕치를 앞세우고 법치는 최소화하자 정도가 공자의 예치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일국의 재상이 되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나라를 덕으로만 다스린다는 것이 비현실적임을. 명재상으로 불린 사람들 중에서 법치 없이 덕치로만 다스린 인물은 전설상에만 존재합니다. 관중, 자산, 안영, 자서 같은 역사 속의 명재상은 모두 덕치와 법치를 병행했습니다. 공자 역시 이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덕치를 앞세우되 법치로 이를 보조한 자산을 높이 평가한 것입니다. 반면 정이 정현 주희 같은 송유들은 현실정치의 감각과 담을 쌓은 채 도덕주의적 탁상공론을 펼쳤기에 그들 명재상의 법가적 요소를 못 견뎌한 것입니다.
자서라는 이름은 여럿이지만 아마도 초소왕과 초혜왕 때 영윤을 지낸 미신(자서는 그의 자)을 말하지 않아 싶습니다. 초평왕(미기질)의 아들이었던 그는 형이자 태자였던 미건이 간신배 비무극(費無極)에 놀아난 부왕에 의해 처형된 뒤 유력한 왕위계승권자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마음에 둔 막내 동생 미진에게 왕위를 양보했으니 그가 곧 초소왕입니다. 초소왕이 어린 시절 오자서가 이끄는 오나라 군대에 의해 수도 영도가 함락되고 초평왕의 시신이 오자서에 의해 매질당하며 망국의 위기에 직면합니다. 이때 자서가 영윤의 자리에 올라 초나라 재건과 부흥에 앞장서게 됩니다.
성인이 된 이후 초소왕은 명군의 자질을 보여줬는데 사마천의 ‘사기’의 공자세가에는 천하주유 중 초나라와 국경을 접한 진나라와 채나라에 머물던 공자를 초빙해 700리 땅을 다스리게 하려 했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이에 대해선 진위 논란이 있습니다만 그 초빙은 일방적으로 취소됩니다. 당시 이를 막은 사람이 자서였습니다.
지방순시 중이던 자서는 공자 초빙 소식을 듣고 부리나케 달려와 초소왕과 독대합니다. 그리고 지금 초나라에 자공 같은 외교관, 안회 같은 경상, 자로 같은 장수, 재여 같은 장관감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초소왕이 “없다”고 답하자 “초나라가 처음 개국할 때 땅이 100리가 안됐는데 그런 인재집단을 거느린 공자에게 700리나 되는 땅을 떼어주면 백성의 민심이 결국 공자에게 쏠리게 돼 초나라의 종묘사직이 위험해질 것”이라면서 만류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따르면 자서는 공자의 꿈이 이뤄지기 직전 이를 전격 무산시킨 장본인입니다. 그러니 공자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수가 없어서 오늘날에도 누군가를 경시할 때 관용적으로 쓰는 '피재피재(彼哉彼哉)'라는 표현이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설사 공자의 초나라 초청 이 후대의 가필이라 하더라도 자서는 성공한 재상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자서는 기원전 488년 초소왕이 병사하자 다시 왕위에 오를 기회를 포기하고 동생의 아들인 미장을 왕으로 추대하니 초혜왕입니다. 자서는 그 직후 통합을 명분으로 태자로 있다가 억울하게 처형된 죽은 맏형의 아들인 미승을 망명지인 오나라에서 데려와 백(百)읍을 맡기고 백공(百公)의 지위를 부여합니다. 공자가 그 재주를 아꼈던 섭공 심제량 등이 불화의 씨앗을 키우는 것이라고 반대했으나 자서는 이를 강행했고 훗날 커다란 화가 되어 돌아옵니다.
야심가였던 백공 승은 결국 반란을 일으켜 삼촌인 자서를 죽이고 한때 초나라 조정을 장악하지만 결국 섭공에 의해 진압되자 목을 매 자살합니다. 그때가 공자가 숨진 기원전 479년이니 자서와 공자는 같은 해에 숨졌으나 공자와 달리 오판으로 인해 비명횡사한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관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관중이 재상으로 있을 때 병읍(騈邑)이란 지명의 땅을 봉지로 갖고 있던 대부 백씨가 중죄를 저지르자 그 땅을 몰수했는데 제환공이 그 땅을 관중에게 하사했다고 합니다. 그로 인해 백씨는 평생(沒齒) 빈궁하게 살아야 했지만 자신의 죄가 분명하고 관중의 공이 워낙 크다 보니 한 번도 원망하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앞글에서 공자가 말했듯이 ‘가난하면 원망하는 마음을 품지 않기가 어려운 법(貧而無怨, 難)’입니다. 그럼에도 백씨가 원망하는 마음을 품을 수 없을 만큼 관중이 공명정대했고 또 그 공이 컸다는 소리입니다.
그렇게 공자는 맹자와 주자와 달리 관중의 공을 공대로 인정할 줄 아는 공평무사한 마음의 소유자였습니다. 반면 주자는 ‘관중과 자산 중에 누가 나은가?’라는 질문을 받고 ‘관중의 덕은 그 재주를 이기지 못하였고 자산의 재주는 그 덕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렇지만 성인의 학문에 대해선 한결 같이 들은 것이 없다’는 편벽된 인물평을 남겼을 뿐입니다.
*사진은 자산 공손교의 초상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