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편 헌문(憲問) 제5장
남궁괄이 공자에게 물었다. "예(羿)는 활을 잘 쏘았고, 오(奡)는 육지에서 배를 매고 끌 정도로 힘이 장사였지만 두 사람 다 제명에 죽지 못했습니다. 우와 직은 몸소 농사를 지었으나 오히려 천하를 갖게 됐습니다.”
공자가 답하지 않았다. 남궁괄이 물러가자 비로소 입을 열었다. “군자로다, 이 사람은. 덕을 숭상하는구나, 이 사람은.”
南宮适問於孔子, 曰: “羿善射, 奡盪舟, 俱不得其死然, 禹稷躬稼而有天下
남궁괄문어공자 왈 예선사 오탕주 구부득기사연 우직궁가이유천하
夫子不答. 南宮适出, 子曰: “君子哉 若人, 尙德哉, 若人.”
부자부답 남궁괄출 자왈 군자재 약인 상덕재 약인
남궁괄(南宮适)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습니다. 맹손 씨의 8대 종주인 맹희자의 아들이자 공자의 제자가 된 남궁경숙(南宮敬叔)과 동일인이라는 주장과 공자의 조카사위 남용(南容)과 동일인이라는 주장이 엇갈립니다. 남궁경숙도 아니고 남용도 아닌 제3의 인물이란 주장도 있습니다.
본명이 중손열(仲孫閱)인 남궁경숙은 ‘예기’에서 관직을 얻으려 뇌물을 뿌린 일로 공자로부터 “빨리 가난해지는 것이 더 낫겠다”는 핀잔을 들은 인물입니다. 반면 남궁괄과 남용은 모두 ‘논어’에서 공자로부터 칭찬을 받은 인물입니다. 따라서 남궁괄을 남궁경숙과 동일인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노나라에서 남궁이란 성씨는 남궁경숙을 시조로 합니다. ‘춘추좌전’ 노소공 10년조를 보면 맹희자가 친구 사이인 두 여인을 첩으로 삼아 그중 한 여인에게서 맹의자(猛毅子․仲孫何忌)와 남궁경숙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자식이 없는 다른 여인에게 남궁경숙을 맡겨 키우게 했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또 노소공 7년조를 보면 맹희자가 죽으면서 유언으로 두 아들인 맹의자와 남궁경숙을 공자의 제자로 삼았다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맹의자는 맹희자의 뒤를 이어 맹손 씨 가문의 9대 종주가 됩니다. 반면 남궁경숙은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뇌물을 뿌리고 다니다 스승에게 면박을 받습니다. 이런 상황을 종합하면 맹의자와 남궁경숙은 이란성쌍둥이이거나 맹의자가 1, 2년 터울의 형일 가능성이 큽니다. 둘 다 서자지만 맹의자가 맹손 씨의 종주로 그 성씨를 이어받고 남궁경숙은 독립해 남궁 씨의 시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수록된 ‘중니제자열전’에 남궁괄이 등장합니다. 그 자(字)를 자용(子容)이라면서 공자가 그 인물됨을 높이 평가해 형의 딸을 시집보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공자 제자 중에 자가 비슷한 사람이 있을 경우엔 자에 성을 붙여 부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남용=자용=남궁괄이 성립됩니다. 하지만 이 경우 남궁괄은 남궁 씨가 아니라 남씨여야 합니다.
그 남궁괄이 공자를 찾아와 다짜고짜 질문을 던집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뜬금없습니다. 예(羿)는 태양이 10개나 떠올랐을 때 활로 9개를 쏴서 떨어뜨렸다는 신화적 존재입니다. 그는 여러모로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를 연상시킵니다. 영웅에겐 미녀가 따르는 법. 그의 아내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미녀이자 최초의 팜 파탈입니다. 서왕모가 예에게 준 장생불사의 약을 훔쳐 먹고 달아난 항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는 요임금 때의 신화적 존재인 예가 아니라 하나라 때 왕위를 찬탈한 역사적 인물인 후예(后羿)를 말합니다. 후예는 하나라 3대 임금인 사태강(姒太康)을 몰아내고 그 동생인 사중강(姒仲康)과 그 아들 사상(姒相)을 꼭두각시 임금으로 앉혀두고 국정을 농단하다가 결국 스스로 왕좌에 앉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정사를 돌보지 않고 태강마냥 사냥만 하다가 병권을 맡긴 부하 장수 한착(寒浞)의 배신으로 시해됩니다.
후예는 여러 모로 신화적 존재인 예와 닮았습니다. 황하 하류에 살던 동이족 일파의 부족장으로 백발백중의 활솜씨를 자랑했다는 점이 그 첫 번째입니다. 두 번째는 아끼던 존재에게 배신당한다는 점입니다. 예는 아내인 항아에게 배신당하고 그의 활솜씨를 질투한 애제자 봉몽(逢夢)에 의해 잠들었을 때 살해됩니다. 후예 역시 왕비인 순호(純狐)와 양아들로 삼을 만큼 총신이었던 한착이 눈이 맞는 바람에 결국 시해되고 맙니다.
후예라 이름은 이렇게 예와 닮았다 하여 생전에 붙여진 것일 수도 있고 죽고 난 뒤 붙여진 별칭일 수도 있습니다. 그로 인해 후대에도 그 둘을 하나로 혼동하는 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예가 비극적 운명의 영웅이라면 후예는 그런 예의 흑화한 판본에 가깝다는 점에서 차별화해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한착은 첫 부인인 북방족 여성 강려(姜蠡)와 사이에 요(澆)와 희(豷)라는 두 아들을 뒀습니다. 오(奡)는 이중 요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는 땅위에 올라온 배를 매고 끌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다고 합니다. 그런 오는 하나라 왕실이 지지하는 세력과 전투에서 선봉장을 맡았고 결국 사상을 죽음에 몰아넣으는 데 일등공신이 됩니다. 그렇지만 결국 사상의 유복자인 사소강(姒少康)이 와신상담 끝에 세력을 키워 공격해오자 아버지 한착과 함께 피살당하고 맙니다. 사소강은 망한 왕조를 다시 부흥(復興)시킨 중국 최초의 군주(중시조)가 됩니다.
우(禹)는 그렇게 사소강이 부흥시킨 하나라의 시조 사문명(姒文明)을 말합니다. 우라는 호칭은 사문명이 다스리던 부족의 이름에서 따온 것입니다. 요임금으로부터 왕위를 선양받은 순임금은 그를 또 우에게 선양합니다. 우임금 역시 동이(東夷)의 수령인 백익(伯益)에게 양위의 뜻을 밝히고 죽었는데 신하들이 우임금의 아들인 사계(姒啓)를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요-순-우로 이어지던 선양의 전통이 이때 깨지면서 하왕조가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직(후직․后稷)은 우와 함께 순임금(요중화․姚重華) 아래 신하로 있던 인물입니다. 우는 당시 최우선 순위의 국가중대사였던 치수(治水)를 맡았고, 직은 농경을 담당해 곡식의 재배법을 널리 전파했다고 알려진 인물입니다. 직은 그래서 오곡의 신으로도 불리게 됩니다. 이 직의 후손이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운 주무왕이 됩니다.
남궁괄의 발언은 무력이 출중했던 후예와 오는 왕위 찬탈에는 성공했을지 몰라도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은 반면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덕을 쌓은 우와 직은 각각 하나라와 주나라의 시조가 되며 대대손손 번성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질문이 아니라 역사에 대한 촌평입니다. 분명 그 뒤를 따르는 질문이 있었을 터인데 그게 누락돼 있습니다.
그것이 몹시 예민한 질문이었음은 공자의 반응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질문을 받으면 항상 답을 주던 공자가 아무런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 내용이 무력보다 문덕(文德)을 숭상한 공자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내용임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했습니다. 겨우 남궁괄이 떠나고 난 뒤 그가 덕을 숭상하는 군자라는 말만 남겼을 뿐입니다. 과연 남궁괄의 질문은 무엇이었을까요?
이를 위해선 음미해볼 것이 있습니다. 남궁괄이 언급한 예(정확히는 후예)는 사태강을 몰아내고 동생인 사중강을 왕위에 앉히고 국정을 농단한 역신입니다. 한착은 그런 예가 총애했던 부하지만 그 역시 반역을 일으킨 인물이고 그런 한착의 아들인 오는 결국 한때 임금이었던 사중강을 죽이는데 앞장 선 인물입니다.
공자시대 노나라에서도 엇비슷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삼환의 우두머리였던 계평자(季平子)는 제후로 모시던 노소공(魯昭公)을 국외로 추방합니다. 그리고 제후 자리를 공석으로 놔둔 채 사실상의 제후 노릇을 합니다. 그러다 7년간 국외를 떠돌던 노소공이 죽자 그 동생인 노정공을 제후의 자리에 앉히고 5년 뒤 숨집니다. 그 계평자가 가장 아끼고 믿었던 총신이 있었으니 바로 양호입니다. 양호는 계평자가 죽고 그 아들인 계환자가 종주의 자리에 오른 뒤 더욱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기고만장해진 끝에 반란을 일으키지만 계환자를 죽이는데 실패해 결국 망명을 떠나게 됩니다.
남궁괄이 언급한 하나라 떄 역사를 노나라 현실에 대입시키면 계평자가 후예에 해당하고 양호는 한착으로 귀결됩니다. 또 노소공과 노정공 형제는 사태강과 사중강 형제헤 해당합니다. 따라서 누락된 남궁괄의 질문은 “어찌 이런 일이 과거의 일이라고만 할 수 있겠습니까?” 내지 “지금 노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공구 선생은 어찌 생각하십니까?”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공자가 이 말에 아무런 반응을 못했다는 것은 아마도 그 시점이 양호가 반란을 일으키기 전후로 그 세력이 가장 막강했을 때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섣불리 남궁괄의 말에 호응했다가 당시 최고의 권력실세였던 양호에게 무슨 화를 입을지 알 수 없었기에 침묵을 택했던 것 같습니다. 양호로부터 직접 등용 제안을 받을 때조차 모호한 태도를 취해야 했던(18편 ‘양화’ 제1장) 공자였기에 더욱 직접적 맞장구를 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남궁괄의 현명함이 더욱 빛을 발하는데 예와 오는 언급하면서 정작 제일 중요한 한착의 이름만 쏙 빼놨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낭궁괄의 구체적 질문내용은 쏙 빼고 남궁괄에 대한 공자의 칭찬만 기록해둔 것 아닐까요? 또 그 발언 당사자를 보호하기 위해 남궁괄이란 가명을 썼을 가능성도 있어 보입니다. 앞서 살펴봤듯이 남궁 씨는 삼환의 일원인 맹손 씨 가문의 방계입니다. 따라서 그 집안사람이 삼환 세력의 우두머리였던 계평자와 그가 총애한 가신 양호를 직접 겨냥했을 리 없을 것이란 안전장치가 마련됩니다.
그 가능성은 적지만 설사 남용이 남궁괄이라 하더라도 삼환 가문의 방계라는 점에서 1차적 보호망이 형성됩니다. 더욱이 양호가 반란을 도모할 때 계손 씨 종주인 계환자의 자리에 그 동생인 계오(季寤)를, 숙손씨 종주인 숙손무숙의 자리엔 그의 서자인 숙손첩(叔孫輒)을 앉히고 그 자신은 맹손 씨 가문 몫의 자리를 독차지해 자신을 중심으로 삼환 세력을 재편하려 했습니다. 따라서 삼환 가문 중에서도 맹손 씨 가문 출신이 양호에 대해 가장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기에 남용이 남궁괄이라 하더라도 충분히 양해 가능하다고 본 것 아닐까요?
훗날 공자가 죽고 나서 이 일화를 ‘논어’에 수록한 제자들은 그 상세한 사정까지는 속속들이 몰랐던 것 같습니다. 다만 남궁괄이란 인물이 고대 역사를 빗대 삼환을 비판했고 공자가 그에 암묵적으로 동의했다는 정도만 파악하고 그 수록을 결정하지 않았나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