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편 헌문(憲問 )제1장
원헌이 부끄러움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나라에 도가 있을 때도 녹봉을 받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도 녹봉을 받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다.”
원헌이 또 물었다. “남을 이기려 하고, 스스로 자랑하고, 남을 원망하고, 욕심을 부리는 것, 이 네 가지를 행하지 않는다면 어질다고 할 만한가요?”
공자가 말했다. “실천하기 어려운 일이기는 한데 어진지는 내 알지 못하겠구나.”
憲問恥. 子曰: “邦有道穀, 邦無道穀, 恥也.”
헌문치 자왈 방유도곡 방무도곡 치야
“克伐怨欲, 不行焉, 可以爲仁矣.” 子曰: “可以爲難矣, 仁則吾不知也.”
극벌원욕 불행언 가이위인의 자왈 가이위난의 인즉오불지야
원헌(原憲‧위의 초상화 속 인물)은 노나라 출신으로 자는 자사(子思)입니다. 공자보다 36세 연하였으니 제(弟) 계열 제자와 자(子) 계열 제자의 징검다리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공문(孔門) 출신 중 청빈(淸貧)과 안빈낙도(安貧樂道)에 있어선 안연(안회), 증석(증점)과 함께 3인방에 꼽힐만한 인물입니다. ‘장자’에는 그런 그와 부유함의 대명사였던 자공을 대비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원헌이 비가 줄줄 새는 방 한 칸짜리 초가삼간에서 거문고를 타고 있었는데 자공이 방문했습니다. 대부의 지위에 있었던 자공의 호화스러운 마차가 그 골목에 들어갈 수가 없어 골목길에 내려 걸어왔습니다. 원헌은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관을 쓰고 발뒤축이 없는 신발을 신고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문 앞에서 자공을 맞았습니다. 이를 본 자공이 “어찌 심하게 병들고 쇠약해졌는가?”라고 인사말을 건네자 원헌이 답했습니다. “재산이 없는 것을 가난이라 하고, 배우고도 실천하지 않는 것을 병들었다 합니다. 지금 나는 가난할 뿐 병든 것은 아니라오.” 이 말을 들은 자공은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설 정도로 자신의 실수를 부끄러워했고 여생 내내 이를 후회했다고 합니다.
‘장자’에 등장하는 공자와 제자의 에피소드는 창작된 경우가 많아 반신반의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마천 역시 ‘중니제자열전’에 그 비슷한 내용을 수록해놨다는 점에서 원헌이란 인물의 원형 같은 걸 발견하게 됩니다. ‘논어’ 14편의 제목으로 등장하는 원헌은 정작 ‘논어’ 전체를 통틀어 이 장에만 등장하는데 딱 2개의 질문만 던집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원헌은 염치를 중시하고 극기(克己)를 강조한 수제파의 인물임을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공자가 덕행이 뛰어나다 꼽은 안연, 민자건(민손), 염백우(염경), 중궁(염옹) 4인방에 못 들어간 것은 결벽증이라고 할 만큼 강직한 탓에 유연함이 부족했기 때문 아닐까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은 부끄러움(恥)에 대한 것입니다. 원헌은 자신의 가난함을 부끄럽지 않게 여기는 대신에 아무리 힘들더라도 염치없는 짓은 하지 말고 살자를 삶의 모토로 삼은 게 아닐까요? 그런 제자를 꿰고 있었을 공자는 벼슬살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듭니다. 가난했던 원헌의 처지에선 벼슬길에 나서는 것만이 그 돌파구임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겁니다.
이런 원헌의 처지를 감안한다면 “정치가 바로 섰을 때 벼슬길에 나아가 녹봉을 받되 정치가 혼탁해졌음에도 계속 녹봉을 받고 있다면 그게 부끄러운 짓이다”라고 새기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희는 엉뚱한 해석을 내놓습니다. 정치가 바로 섰다 해도 나라에 큰 도움도 되지 못한 주제에 녹봉을 받아먹는 것 역시 부끄러운 짓이라는 뜻이 함축돼 있다는 겁니다.
이는 원헌의 처지를 망각한 채 공허한 도덕 명분론만 앞세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공자가 가난하지만 자존심만 센 제자에게 “너도 밥값 못하면 당장 벼슬살이 때려치워야 한다”라는 모진 말을 던졌을 리가 없습니다. 그보다는 가난 타개를 위해 벼슬살이에 나설 것을 은연중에 권하면서도 나라꼴이 엉망일 때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란 말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 합리화시키지 말고 과감히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한다고 충고한 것으로 보는 게 인간미 넘치는 해석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어짊(仁)에 대한 것입니다. 원헌은 어짊을 수기(修己) 차원의 덕의 관점에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남을 이기려 하지 않고, 잘난 척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 않고,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을 실천하면 어질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묻습니다. 이는 내 안에서 들끓는 에고(ego)를 억제하는 극기(克己)이자 자신을 갈고닦는 수기(修己)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 공자는 안연에게 어짊의 본질에 대해 ‘극기복례(克己復禮)’라 답한 적이 있습니다. 또 수많은 후학들이 ‘수기치인(修己治人)’이란 말로 공자가 말한 어짊을 표현하곤 합니다. 이를 감안하면 원헌의 답에는 극기와 수기만 있을 뿐 복례와 치인이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덕만 도드라질 뿐 도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공자는 “그것이 실천하기 힘든 것이긴하지만 어짊의 경지에 이르기엔 부족함이 있다”라고 답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자는 어짊에 대한 원헌의 이해에 부족한 점을 콕 찍어서 얘기해주지 않았을까요? 원헌의 에피소드를 분석해보면 가난에 대한 부끄러움을 지적 도덕적 우월감으로 대체하려는 심리가 뚜렷이 읽힙니다. 공자가 사구(司寇)의 벼슬을 맡았을 때 공자가 자신의 가재(家宰)로 임명한 사람이 20대 중반의 원헌이었습니다. 그의 가남함을 알았기에 900두(1두=1말=10되)의 상당한 녹봉을 주려했으나 원헌은 이마저 사양했습니다. 나라에 도가 섰으니 기쁘게 벼슬길에 나서면서도 스승의 남다른 배려를 알았기에 이 자부심 넘치는 사내는 더 더욱 사양한 것으로 봐야하지 않을까요?
‘눈치 100단’인 자공이 이를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원헌의 자존심을 건드린 자신의 실수를 더욱 뼈저리게 반성했다고 봐야 합니다. 공자 역시 이를 꿰고 있었기에 “나도 잘 모르겠구나”라고 자신을 낮춰가면서 원헌 스스로 그 배움의 부족함을 메우도록 유도한 것 아닐까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공자가 사람을 그 결대로 키워내는 인간미 넘치는 스승이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