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편 자로(子路) 제28장
자로가 물었다. “어떻게 해야 선비라 할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절절하면서도 까칠하게 충고하면서도 화목하게 지낸다면 선비라고 할 수 있다. 친구는 절실하면서도 까칠하게 충고하고, 형제는 서로 화목하게 지낸다.”
子路問曰: “何如斯可謂之士矣?”
자로문왈 하여사가위지사의
子曰: “切切偲偲, 怡怡如也, 可謂士矣. 朋友切切偲偲, 兄弟怡怡.”
자왈 절절시시 이이여야 가위사의 붕우절절시시 형제이이
사(士)는 공자 시대 하위 공무원을 뜻했습니다. 군자 아래서 실무를 처리하는 관료가 사입니다. 그러다 송대 이후 벼슬 여부에 상관없이 군자의 삶을 지향하는 선비 일반을 지칭하게 됐습니다.
여기서 자로가 묻는 사는 엄밀히 말하면 군자 아래서 실무를 처리하는 관료 일반을 지칭한다고 봐야합니다. 그렇지만 현대적 의미에 맞게 선비로 새겨도 큰 문제는 없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같은 질문을 자공이 하는데 그때의 답은 또 다릅니다(자로 편 제20장).
원문의 핵심 한자는 ‘굳셀 시’(偲)와 ‘기쁠 이’(怡)입니다. 偲는 굳세다, 권면하다, 똑똑하다 등 뜻이 여럿입니다. 반면 怡는 기뻐하다, 화락(和樂)하다로 그 뜻이 대동소이합니다. 이럴 땐 의미가 명확한 怡를 중심으로 偲의 뜻을 유추할 필요가 있습니다.
怡怡는 형과 아우가 모두 기뻐하는 것이니 화목한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偲偲는 무엇을 말할까요? 1차적으로 친구 간에 서로 바른 길로 가도록 충고하고 권면한다는 뜻으로 새기는 것이 맞을 겁니다. 그런데 그 앞에 切切이 있습니다. 이를 切偲라는 한 단어를 풀어서 두 번씩 반복한 것으로 본다면 ‘절실하게 충고한다’로 새기는 것이 적절합니다.
문제는 이 경우 너무 평범한 말이 되어버린다는 겁니다. 친구처럼 절실하게 충고하고, 형제처럼 화목하게 지내는 것만으로 선비로 불릴 자격이 생긴다는 싱거운 소리밖에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에 대한 해명은 자로가 워낙 과격해 동료에게 함부로 굴기에 동료의 중요성을 일깨워주려고 한 말이라는 것입니다. 탁상공론에 가까운 이해입니다.
제가 볼 때 의리남인 자로는 (공자 같은) 윗사람도 잘 챙기고 (자장 같은) 아랫사람도 잘 돌볼 사람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자로를 비판한 게 아니라 칭찬한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공문의 맏형인 자로가 제(弟)에 해당하는 동료 제자를 챙기면서도 잘못에 대해 쓴 소리도 하고, 자(子)에 해당하는 어린 제자에 대해선 형제의 우애를 강조하는 것을 보면서 “너 같은 사람이 곧 선비니라”라고 격려해줬다고 봐야합니다. 사실 자로는 선비의 단계를 뛰어넘어 군자의 경지를 넘볼 자격을 갖춘 사람이니까요.
이런 맥락을 이해하면 절절시시(切切偲偲)는 그 둘을 분리해 ‘절실하게 충고하고 엄격하게 권면한다’로 새겨아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시시(偲偲)와 이이(怡怡)를 대조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니 전자는 잘못이 있을 땐 채찍질도 마다않는 것이요 후자는 평소에는 다정하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평소엔 형제처럼 화목하게 지내지만 잘못이 있을 땐 친구처럼 까칠한 충고도 할 수 있어야한다는 소리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친구와 형제의 예를 들었을까요? 군자와 선비의 수직적 관계가 아니라 선비와 선비의 수평적 관계에 대해 얘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로는 수직적 관계에선 꽤 엄격했을 공산이 높습니다. 반면 수평적 관계에 대해선 많이 너그럽지 않았나 싶습니다. 염유가 공자에게 혼날 때 그 곁에 나란히 서서 함께 벌 받은 이가 자로였음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렇게 공자의 눈에 비친 자로는 친구의 까칠함과 형제의 다정함을 함께 지닌 사내입니다. 그래서 자로와 같은 인물은 군자의 경지는 몰라도 선비가 되고도 남는다고 칭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