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편 자로(子路) 제22장
공자가 말했다. “남방 사람들 속담에 ‘사람이 일관성이 없으면 점 치고 병 고치는 무의(巫醫) 노릇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좋은 말이로다!”
(주역의 항(恒)괘에) “그 덕에 일관성이 없으면 수치스러운 일을 겪을 수 있다”는 구절이 있다. 공자가 말했다. “점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子曰: “南人有言曰: ‘人而無恒, 不可以作巫醫.’ 善夫!”
자왈 남인유언왈 인이무항 불가이작무의 선부
“不恒其德, 或承之羞,” 子曰: “不占而已矣.”
불항기덕 혹승지수 자왈 부점이이의
무의(巫醫)를 무당과 의사로 새겨선 안 됩니다. 점도 치고 아픈 사람도 고쳐주는 샤먼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고대 중국에서 매우 중용한 존재였습니다. 전쟁과 같은 국가 중대사를 앞두고 점을 치는 일과 아픈 사람을 고쳐주는 일을 동시에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공자와 같은 유인(儒人)도 그 기원을 추적해보면 이런 샤머니즘의 전통과 만나게 됩니다.
점을 치는 것은 거북이 배껍질을 불에 그슬려 그 무늬를 통해 미래에 닥칠 징조를 읽어내는 복(卜)과 가새풀 또는 톱풀로 불리는 시초(蓍草) 줄기의 숫자를 세서 점을 치는 서(筮)가 있었습니다. 전자를 구복점, 후자를 시초점이라고 했습니다. 주역은 시초점의 수리통계적 원리에 구복점의 형상(괘)의 원리를 더해 만들어진 점술서라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주역점을 칠 때 시초 줄기 대신 대나무 줄기 같은 산가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매우 오랜 전통을 자랑합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은나라 때부터 이를 전담하는 관직을 뒀습니다. 축(祝), 종(宗), 복(卜), 사(史)가 그것입니다. 축(祝)과 종(宗)은 각각 귀신을 부르는 일과 제사 준비를 담당했습니다. 복(卜)과 사(史)는 각각 점을 치고 그 결과를 기록하는 일을 담당했습니다. 앞서 위(衛)나라에서 종묘사직의 제사를 담당한 상대부인 축타(祝鮀) 또는 사어(史魚)라는 이름이 등장했습니다. 그 이름의 축(祝)과 사(史)가 그의 벼슬명과 관련 있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축타 내지 사어처럼 공자 역시 제례를 담당하는 축이자 점친 것을 기록하다 역사자료를 전담하게 된 사로 훈련받은 유인(儒人)이었습니다. 또한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고사성어를 남길 만큼 공자가 탐독한 책이 바로 주역이었으니 곧 점술과 관련된 책이었습니다. 심지어 공자의 어머니가 니구산에 제사를 올리는 무당이었다는 주장까지 있으니 유(儒)와 무(巫)의 뿌리가 같다는 것은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물론 뿌리가 같다 하여 후대의 분화 또한 무시해선 안 됩니다. 공자 그 자신부터가 합리적인 유와 비합리적인 무를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논어’만 봐도 무의 세계와 거리를 두는 대목을 여럿 확인할 수 있습니다. ‘공경하되 귀신을 멀리하는 것을 지혜롭다고 한다’(6편 옹야 제20장),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7편 술이 제20장), ‘사람을 섬기지 못하거늘 어찌 귀신을 섬기겠는가’와 ‘삶을 아직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리요’(11편 선진 제11장)입니다. 다만 부모와 조상에 대한 제사만큼은 강조했는데 그 역시 혼령이 있다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선조에 대한 감사와 존중을 위해서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런 맥락을 파악하면 무의에 대한 공자의 인식이 고대의 존숭과 후대의 경멸을 가르는 분기점에 해당한다는 인식에 도달하시게 될 겁니다. 춘추시대에도 국가의 길흉화복을 치는 점인(占人)과 제례를 담당하는 유인뿐 아니라 병을 고치는 의인(醫人)도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점도 치고 병도 고쳐주는 무의는 민간 차원에서 제법 존중받는 사람들로 간주하는 것이 적절해 보입니다.
하지만 원문의 남인은 양자강 이남에서 사는 사람을 말하니 곧 초나라(형주), 오나라(소주), 월나라(항주) 사람을 뜻합니다. 이들은 춘추시대가 되어서야 중원(中原)으로 불리는 중국 중심부에 편입되기 시작해 한나라가 세워질 무렵 중화문명의 당당한 일원이 됩니다. 이들 지역을 뜻하는 강남(江南)이라는 표현도 한나라 때부터 자리 잡게 됩니다. 따라서 공자시대만 해도 이 지역은 변방에 해당했기에 문명 수준이 낮다는 인식이 팽배했습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무의의 위상이 더 높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공자는 여기서 의도적으로 원시적인 남방의 무속 전통과 그보다 진화한 북방의 주역 이론을 대비시키고 있는 겁니다. 비합리적인 무(巫)와 합리적인 유(儒)를 분리하는 사유방식을 주입하기 위한 의도적 진술입니다. 물론 결론은 무의 세계에서건 유의 세계에서건 똑같이 일관성(恒)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결론을 유도하는 과정에서 유와 무의 부동(不同)을 깊게 각인시켰다는 점에서 앞서 살펴본 화이부동(和而不同)을 절묘하게 실천한 화술이란 감탄이 흘러나옵니다. 선부(善夫), 공부자(孔夫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