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편 자로(子路) 제15장
노정공이 물었다. “한마디 말로 나라를 일으킬 수 있다는데 그러한 말이 있을까?”
공자가 대답했다. “말로써 그럴 수는 없겠지만 그에 근접한 말은 있습니다. ‘임금 노릇 하기도 어렵고 신하 노릇 하기도 쉽지 않다’고들 하는 말입니다. 만일 임금 노릇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안다면 나라를 일으킬 수 있는 한마디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노정공이 다시 물었다.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을 수 있다는데 그러한 말이 있을까?”
공자가 대답했다. “말로써 그럴 수는 없겠지만 그에 근접한 말은 있습니다. ‘내가 임금 노릇하며 유일한 즐거움은 말을 꺼내면 어기지 않은 것이다’라고들 하는 말입니다. 만일 임금의 말이 옳아서 그 말을 어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면 어찌 좋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만일 임금의 말이 옳지 않은데도 어기지 않는 사람이 없다면 (이야말로) 나라를 망칠 수 있는 한마디 말에 가깝지 않겠습니까?”
定公問: “一言而可以興邦, 有諸?”
정공문 일언이가이흥방 유저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爲君難, 爲臣不易.’ 如知爲君之難也, 不幾乎一言而興邦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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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一言而喪邦, 有諸?”
왈 일언이상방 유저
孔子對曰: “言不可以若是其幾也. 人之言曰: ‘予無樂乎爲君, 唯其言而莫予違也.’ 如其善而莫之違也, 不亦善乎? 如不善而莫之違也, 不幾乎一言而喪邦乎?“
공자대왈 언불가이약시기기야 인지언왈 여무낙호위군 유기언이막여위야 여기선이막지위야 불역선호 여불선이막지위야 불기호일언이상방호
노정공(희송)은 공자가 노나라에서 출사해 5년 안팎 관직에 있을 때 모신 노나라 제후입니다. 삼환세력에 쫓겨 제나라로 망명간 뒤 죽은 뒤에야 노나라로 돌아올 수 있었던 노소공(희조 또는 희주)의 동생이자 공자가 천하주유를 마치고 노나라로 돌아왔을 때 제후인 노애공(희장)의 아버지입니다. 형의 상여를 노나라까지 끌고 왔고, 삼환의 추대로 재위에 올랐으며 삼환 세력의 좌장인 계환자의 가재에 불과한 양호의 반란으로 국정이 휘청하는 걸 지켜봐야 했던 사람입니다.
노나라 공실의 권위 회복을 간절히 원했을 그의 질문은 언어의 7번째 기능을 염두에 둔 것 같습니다. 러시아 출신의 미국 언어학자인 로만 야콥슨이 언어의 여섯 가지 기능을 언급하면서 그 번외 기능으로 언급한 기능, 바로 말을 꺼내면 그것이 현실이 되는 ‘마법적이고 주술적 기능’입니다. 해리 포터가 외는 마법의 주문 같은 것이지요. 말 한마디로 나라를 흥하게 하거나 상실할 위기에 처하게 될 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서 노나라 정치에 대한 노정공의 답답함과 간절함을 읽어내게 되는 이유입니다.
공자는 15편 위령공 제41장에서 “말은 뜻을 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辭達而已矣)”고 단언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그런 공자라 해도 노정공의 간절함을 외면할 순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뭐 그런 말이 어디 있겠습니까만”이라면서도 그 언저리(幾)에 있다고 할 만한 말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듭니다. ‘말에 대해 논하다’는 뜻의 ‘논어’에 부합하는 내용이라고나 할까요?
그렇게 꺼낸 말이 인구에 회자되는 아주 흔한 말입니다. 첫째 나라를 흥하게 할 한마디 말로 ‘임금 노릇 하기도 어렵고 신하 노릇 하기도 쉽지 않다’를 꼽습니다. 공자는 앞 구절에만 초점을 맞춰 남들은 다 부러워하는 임금 노릇이 어렵다는 걸 깨우치는 것만으로도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군주가 끊임없이 경계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다잡는 자세만 유지한다면 흥국(興國)할 수 있다고 격려한 것입니다.
그런데 두 번째 대목 얘기는 쏙 빠져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노정공의 엉뚱한 질문에 답하는 자신의 처지를 풍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거기엔 이런 속내가 숨어있다 할 것입니다. ‘말 한마디로 나라를 흥하게 하다니요? 그런 황당한 질문에 일일이 답해줘야 하는 신하 노릇도 쉽지 않다는 걸 좀 알아주시죠?’
두 번째 나라를 상실할 상국(喪國)의 한마디 말로 ‘임금 노릇하는 즐거움 중 유일한 것이 말을 꺼내면 그게 곧 법이 되는 것이다’를 꼽습니다. 어명이라면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발상이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뒤집어 말하면 ‘내가 결정하면 잔말 말고 따르라’ 거나 ‘내 말이 곧 국법’이란 식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 나라를 망치는 지름길이라는 것이지요.
이 두 번째 말에 대한 설명에는 노정공을 겨냥한 비판도 함의돼 있습니다. 한마디 말로 나라를 흥하게 하고 망하게 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라는 비판입니다. ‘임금인 내 한 마디 말로 나라의 흥망을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그런 오만함이 망조를 불러온다는 발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발상 자체에 ‘내 말 한마디가 나라의 명운을 가를 수 있다’는 오만함이 숨겨져 있으니 그런 주술적인 말에 현혹되기보다는 덕을 쌓고 도를 닦는데 치중하라고 에둘러 비판한 것입니다.
문제는 후대의 유학자들이 ‘공자=만고의 충신’이란 편견에 입각해 이 텍스트를 해석한 탓에 그 밑바닥에 숨은 이런 비판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데 있습니다. 성인군자인 공자가 자신이 섬기는 군주를 비판할 리 없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그 밑바닥에 깔린 비판의 메시지를 독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 장의 공자 발언에는 두 겹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단순한 말속에 진리가 숨어있으니 그 참된 뜻을 헤아려 실천에 힘쓰라’는 충언은 표면적 메시지에 해당합니다. 거기엔 심층적 비판의 메시지도 숨겨져 있습니다. ‘당신 자신의 말 한마디에 나라의 명운이 좌우되리라는 황당한 미몽에서 깨어나 당신을 대신해 나라를 바른 길로 이끌 현명한 신하를 많이 발탁하고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라’입니다. 이 말을 직접 들은 노정공은 아마도 두 번째 비판의 메시지까지 알아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2500년이 지난 지금까지 공자를 만고의 충신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들에겐 요령부득의 메시지를 넘어 신성모독의 메시지로 들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