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편 자로(子路) 제13장
공자가 말했다. “진실로 몸가짐을 바르게 할 수 있다면 정치를 하는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몸가짐을 바르게 할 수 없으면서 어찌 다른 사람을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
子曰: “苟正其身矣, 於從政乎何有? 不能正其身, 如正人何?”
자왈 구정기신의 어종정호하유 불능정기신 여정인하
정치의 본질이 바로잡는 것에 있다고 한 ‘정자정야(政者正也‧12편 안연 제17장)’ 테마에 부응하는 내용입니다. 개인적 차원의 윤리와 집단적 차원의 정치를 일치시키려 한 유교의 한계를 지적할 때 비판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윤리와 정치를 분리해 사고하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윤리와 정치의 분리는 15세기 ‘군주론’을 집필한 마키아벨리의 등장과 함께 시작됐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동양의 유교적 정치관처럼 서양의 기독교적 정치관 역시 윤리적 가치를 표방했지만 그 실상은 약육강식의 논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그런 현실을 직시하는 현실주의에 입각한 정치가 필요함을 역설했습니다. 사자의 힘과 여우의 교활함을 함께 갖춘 통치술에 정통해야 내분과 외란을 차단하고 국민의 삶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런 마키아벨리를 제자백가의 법가 사상가와 등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상앙이나 한비자 같은 법가의 사상가는 뼛속까지 부국강병주의자였습니다. 반대로 마키아벨리는 뼛속까지 공화주의자였습니다. 공화주의라는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한 과도기적 정치제제로서 중앙집권적 군주정의 효율적 운용방식을 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피렌체 공화정에서 13년간 외교를 담당하는 제2서기관(부통령)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고대 로마공화정을 최고의 정치체제라는 신념을 간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당시 공화정 체제였던 도시국가들이 군주정 체제로 넘어가는 이탈리아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강력한 군주정을 통해 이탈리아의 통일을 먼저 성취하고 그 이후 공화정 체제를 도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꿰뚫어 본 것입니다. 실제 ‘군주정’ 집필 이후 500년간 이탈리아의 역사는 마키아벨리가 예측한 대로 흘러갔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서양에서 이런 마키아벨리의 진가가 인정받는 데는 50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그 강력한 증거가 아직도 목적을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모술수를 펼치는 사람을 마키아벨리스트라고 칭하는 것에서 확인됩니다. 그가 씨앗을 뿌린 현실주의 이론은 20세기 들어, 그것도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완성된 형태가 마련됩니다. 국제정치학 분야에선 1948년 출간된 한스 모겐소의 ‘국가 간의 정치’로 집대성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치사상 측면에선 미국의 신학자였던 라인홀드 니버가 1932년 발표한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를 통해 완성됐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니버의 책은 도덕적 인간이 되는 것만으로 결코 훌륭한 정치가 이뤄지지 않음을 직시할 때 비로소 좋은 정치가 출현함을 있음을 설파합니다. 선악의 기준이 적용되는 도덕과 좋음과 나쁨이 적용되는 정치는 그 범주가 다르다는 것을 다른 사람도 아닌 기독교 목사가 간파해냈던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본인이 인정할지는 모르겠지만 니버야말로 진정한 마키아벨리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사라들은 여전히 마키아벨리나 니버와 같이 사고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 그들 대다수는 윤리와 정치를 동일한 범주로 묶어서 사고하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왜 그럴까요? 윤리와 정치의 범주가 다르다 하더라도 그 둘이 관련돼 있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마키아벨리와 니버가 간파했듯이 도덕군자가 반드시 좋은 정치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동시에 좋은 정치가치고 도덕성이 결여된 사람 또한 드뭅니다. 정치현실에 엄격한 윤리적 잣대를 들이댈 수는 없지만 반대로 윤리적 일관성이 떨어지는 사람의 정치적 생명력은 짧을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 한국정치의 최대 키워드로 떠오른 ‘내로남불’이 가리키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몸가짐을 바르게 할 수 없으면서 어찌 다른 사람을 바로 잡을 수 있겠는가?’라는 공자의 질문이 한국 정치현실을 통타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정치인이 반드시 대단한 도덕주의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최소한의 도덕적 일관성은 유지해야한다는 일침인 것입니다. '사드와 함께 칸트를' 읽으라 했던 라캉의 발언을 빌려 말한다면 '마키아벨리와 함께 공자를' 읽어야할 이유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공자가 말하는 정자정야(政者正也)의 정(正)을 반드시 윤리적 올바름의 관철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공화주의 또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그것은 과거 정부의 오판과 실수를 바로 잡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어떨까요? 정상궤도에서 이탈해 휘어지고 비뚤어진 것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로 잡는 것 또한 정(正)에 담긴 의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