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과 바람의 노래

12편 안연(晏然) 제19장

by 펭소아

계강자가 정치에 대해 공자에게 물으면서 말했다. “무도한 악인을 죽여서 백성들을 선하게 인도하면 어떻겠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대가 정치를 한다면 어찌 사람을 죽일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대가 참으로 선하고자 한다면 그로 인해 백성들은 선하게 될 것입니다. 군자의 덕이 바람이라면 소인의 덕은 풀입니다. 풀은 바람이 불면 반드시 그 방향으로 쓸리기 마련입니다.”


季康子問政於孔子曰: “如殺無道, 以就有道, 何如?”

계강자문정어공자왈 여살무도 이취유도 하여

孔子對曰: “子爲政, 焉用殺? 子欲善而民善矣.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 必偃.”

공자대왈 자위정 언용살 자욕선이민이선 군자지덕풍 소인지덕초 초상지풍 필언



21세기를 사는 한국인에게 이 구절은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김수영의 시 ‘풀’과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풀’은 김수영이 1969년 교통사고로 죽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시라는 점에서 절명시나 다름없습니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져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도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김수영은 한국의 진정한 모더니스트였습니다. 모더니스트가 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동서고금의 텍스트에 대한 해박함입니다. 그래서 주지주의라고 번역되기도 한 것입니다. 김수영의 이 시는 ‘논어’의 이 구절과 미국 시인 월터 휘트먼의 시집 ‘풀잎’(1855)을 함께 알아야 제대로 음미될 수 있습니다.


김수영이 읽은 ‘논어’ 속의 풀은 소인지덕(小人之德)의 상징입니다. 군자지덕(君子之德)을 상징하는 바람의 종속변수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바람의 방향에 따라 눕고 일어나기를 반복합니다. 반면 휘트먼의 시집 속 풀은 생명력 넘치는 미국 민중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아 자신의 존재를 환기시키려 일부러 떨어뜨린 ‘하나님의 손수건’입니다.


김수영은 위정자를 지향하는 엘리트로서 군자 중심의 사유를 하는 유교적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당연히 소인지덕을 배격하고 군자지덕을 추구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겠지요. 하지만 1960년 4.19혁명을 통해 소인이 그 중심이 된 민주주의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체험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4.19 혁명은 소인지덕인 풀이 군자지덕인 바람의 향배를 바꾸게 한 사건이었습니다.


유교 경전과 휘트먼과 동시대 미국 사상가인 에머슨의 책을 번역했던 김수영은 유교와 민주주의의 간극을 상징하는 소재로서 ‘풀’을 새롭게 바라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바림이 불어야 풀이 눕는다는 객관적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하지만 김수영에겐 에머슨의 초월주의 사상이란 무기가 있습니다. 객관적 현상을 뛰어넘는 초월적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그래서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고, 더 빨리 울고, 더 빨리 웃고, 더 빨리 일어나는 풀이 노래됩니다. 사실 풀이 바람보다 먼저 눕진 않지만 먼저 일어난다는 것은 객관적 사실에 부합하는 내용입니다. 그렇게 건강한 민중(소인)에 대한 한국적 찬가가 탄생한 것입니다.


자, 그러면 군자지덕을 바람에 비유한 공자의 가르침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은 것일까요? 군자를 부각하기 위해 소인은 폄하한 것은 맹자 이후 유가의 맹점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소인은 못난 사람이 아니라 그냥 보통사람을 뜻합니다. 공자시대나 21세기나 80% 이상에 해당하는 보통사람은 모두 소인입니다. 군자는 그런 소인들을 이끌어야 할 지도자에 해당하는 나머지 20% 이하가 지향해야 할 리더십을 갖춘 인물을 뜻합니다.


그런 인물이 갖춰야 할 자격조건으로 이 장에서 공자가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이 무엇인가요? 무도하다는 이유만으로 소인을 탄압하는 일을 멈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대적 언어로 치환하자면 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해선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공자가 대사구가 되자마자 ‘소인의 걸웅’이라는 이유만으로 소정묘라는 대부를 처형했다는 기록이 허구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풀을 눕게 하는 바람이 되라는 가르침은 그다음에 등장합니다. 민중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게 솔선수범하라는 뜻입니다. 다시 현대적 언어, 김수영의 언어로 말하자면 풀이 먼저 눕고, 먼저 일어나는 것을 읽어서 그 방향으로 불어갈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풀이 울면 그 울음을 받아주고, 풀이 웃으면 함께 웃어줄 수 있는 바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수영의 ‘풀’이 민주주의 시대 민초의 마음을 노래했다면 공자가 말하고자 했던 군자의 마음을 대변한 노래도 있습니다. 조용필의 ‘바람의 노래’입니다. ‘그리움은 어디로 가는가/나의 작은 지혜로는 알 수가 없네/ 내가 아는 건 살아가는 방법뿐이야//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현대의 군자는 바람의 덕을 갖추고자 하지만 풀잎이 어느 방향으로 눕고자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을 비켜갈 수 없습니다. 그러다 풀잎이 울고 웃는 것에 귀 기울이려면 그들을 사랑하는 수밖에 없음을 깨닫습니다. 풀잎은 지상에서 가장 볼 품 없는 존재를 상징하나니 그 풀잎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공자가 말한 바람의 진정한 군자지덕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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