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편 자장(子張) 제20장
자공이 말하기를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의 선하지 않음이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군자는 하류에 머물기를 싫어하나니, 천하의 악이란 악이 모조리 그리로 모여들기 때문이다."
子貢曰: "紂之不善, 不如是之甚也. 是以君子惡居下流. 天下之惡皆歸焉."
자공왈 주지불선 불여시지심야 시이군자오거하류 천하지악개귀언
자공이 독립적이고 날카로운 지성의 소유자였음을 보여주는 구절입니다. 은나라 최후의 군주이자 역대 최악의 폭군이라 비난받는 주왕(紂王)이 실제로 그렇게까지 나쁜 왕이 아니었을 수 있음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공자는 은나라(건국 당시엔 상나라)를 세운 상족(商族)의 후예였습니다. 그래서 죽을 때도 은나라 식으로 상을 치러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이상향으로 삼은 것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창업한 문왕(文王)과 무왕(武王) 그리고 주공(周公)의 정치와 제도였습니다. 주나라 성립 후 상족은 주로 장사치로 전락해 장사꾼을 지금도 상인(商人)이라고 불리게 됐습니다.
상인은 이문을 중시하는데 공자는 이를 소인지도(小人之道)라 거부했습니다. 대신 주나라 때의 의례(儀禮)를 해설한 예기(禮記)를 편찬해가면서 그를 내면화한 군자지도(君子之道)의 삶을 꿈꿨습니다. 자공은 그런 공자를 우러르면서도 ‘역사에서 패자는 말이 없고 승자의 기록만 살아남기에 패자가 온갖 오욕을 뒤집어쓴다는 걸 꿰뚫어 본 것입니다.
본명이 자수신(子受辛)인 주왕에 대한 역사기록은 가공할 정도입니다. 달기(妲己)라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의 미인이 등장하고 ‘술연못, 고기숲’이라는 뜻의 주지육림(酒池肉林)이 나오고, 뜨겁게 달군 청동 기둥에 기름칠하고 미끄러지면 숯불에 타 죽게 만드는 포락(炮烙)이라는 끔찍한 형벌이 빠지지 않습니다.
왠지 낯설지 않은데 이유가 있습니다. 그건 모두 은나라 앞에 있던 하나라의 마지막 군주 걸왕(桀王)이 저지른 패악의 삼종세트이기 때문입니다.. 본명이 사리계(姒履癸)인 걸왕의 악행에도 비단 찢어지는 소리를 좋아한 말희(末姬)라는 요부와 주지육림, 포락이 빠지지 않고 등장합니다.
특히 경국지색은 서주(西周) 시대 최후의 왕인 유왕(幽王·본명 희궁열·姬宮涅)의 요녀 포사(褒姒)와 춘추시대 오패의 최후를 장식한 오왕 부차(夫差)의 팜므파탈 서시(西施)로 계속 변주됩니다. 포사와 서시는 웃지 않은 미녀라는 공통점을 지녔습니다. 그런 포사를 웃기려고 희궁열은 외적이 침략한 긴급한 순간을 위한 봉화를 올려 제후들이 군대를 끌고 허겁지겁 달려오게 했다가 나라를 반쪽 냈고 부차는 반대로 서시의 찡그리는 표정에 혹해 정사를 게을리하다가 국가와 목숨을 잃었습니다.
사리계와 자수신의 패악은 모두 당대의 기록이 아닙니다. 중국의 역사시대는 주나라가 세워지고 200년 정도가 지난 기원전 841년 왕 없이 여러 신하들의 공동통치가 이뤄지던 공화(共和) 시대부터 시작됐습니다. 따라서 사리계와 자수신의 패악 역시 그 이후 기록된 것이니 정확했을 리가 없습니다. 사리계의 악행을 자수신에게 뒤집어 씌웠을 수도 있고, 역사시대에서 가까운 자수신의 패악을 원형으로 삼아 다시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사리계의 폭정에 거꾸로 적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둘이 짬뽕돼 섞인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 보면 사리계와 자수신이 닮은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후대의 초패왕 항우를 연상시킬 만큼 완력과 총기를 겸비했다는 점입니다. 사리계의 경우는 맨손으로 호랑이와 싸우고 굽은 쇠갈고리를 손으로 바로 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장사였습니다. 당시는 청동기 문명이었으므로 후대의 가필임이 분명하지만 그만큼 힘이 셌음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자수신에 대해 사마천의 ‘사기’는 이렇게 전합니다.
“주는 말재간이 뛰어나고 견문이 매우 빼어났고, 힘이 보통 사람을 능가해 맨손으로도 맹수와 싸웠다. 지혜는 간언(諫言)이 필요하지 않았고, 말재주는 허물을 교묘하게 감추기에 충분했다. 자신의 재능을 신하들에게 뽐내며 천하에 명성을 드높이려 했고, 모두가 자신의 아래에 있다고 여겼다.”
만일 폭군으로 몰려 쫓겨나지만 않았다면 영웅호걸의 풍모를 지녔다고 찬사를 받았을 겁니다. 사기가 후한의 한무제 때 지어졌다는 점에서 한고조 유방의 최대 적수였던 항우의 그림자가 사리계와 자수신에게서 어른거리는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요?
사리계와 자수신은 실수도 똑같이 저지릅니다. 자신의 밑에서 제후로 있가 은탕왕이 된 자천을(子天乙)과 주문왕이 된 희창(姬昌)을 붙잡아뒀다가 풀어준 것입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자천을과 희창(엄말 하게는 그 아들 희발·姬發)은 은밀한 세력을 키워 사리계와 자수신을 죽이고 새 왕조를 개창합니다. 자수신은 사리계를 능가하는 패악을 하나 더 저지릅니다. 자신에게 바른말하는 신하를 죽여서 포를 뜨고 젓갈로 담근 겁니다.
야사에 따르면 더 끔찍한 짓도 저질렀는데 바로 희창의 맏아들 희백고(姬伯考)를 죽여서 그 고깃국을 아비인 희창에게 먹인 것입니다. 자수신은 고깃국의 정체를 모르고 먹은 희창에게 "그대가 성인이라던데 아들의 고기를 먹는 사람을 어지 성인이라 하겠는가”라며 비웃었다고 합니다. 뒤늦게 이를 안 희창이 토해낸 것이 작은 무덤을 이룰 정도였다는데 중국 허난성 탕음 외곽 유리성 뒤쪽에 ‘희백고의 묘’라는 묘비명이 적힌 ‘토분(吐墳)’까지 남아있더군요.
자공은 이 일화가 앞뒤가 맞지 않음을 간파했을 겁니다. 아들의 고기까지 먹게 할 정도로 패악을 저지르고도 후환을 두려워하지 않고 희창을 서쪽 변경을 지키는 서백(西伯)으로 복귀시켰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자수신은 항우처럼 자신의 힘과 지혜만을 믿고 오만함이란 죄를 저질렀을지언정 후대에 기록처럼 그토록 황음무도한 인물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다 여러 제후 세력을 연합한 조직의 힘을 내세운 희창과 희발 부자에게 패배해 몰락하면서 천하의 악이란 악을 모조리 뒤집어써 중국 역사상 최악의 군주로 몰리게 된 것 아닐까요?
자공 역시 상나라 후손이 많이 사는 위(衛)나라 출신입니다. 게다가 공자와 달리 이재에 눈이 밝았다는 점에서 상인의 후손일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좇아 군자지도를 추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상인의 길까지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그래서 큰돈을 모았고 그중 상당수를 스승의 추모사업과 공자학단 후원사업에 썼을 가능성이 큽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군자지도를 걸었던 자공은 역사관도 스승을 본받되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풀어냈습니다.
스승이 말한 군자의 길이 길게 봤을 때 이문이 남는 장사라는 겁니다. 모든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나니, 한번 추락해 대중의 발바닥에 밟히기 시작하면 끝 갈 떼가 없기에 추락의 빌미를 주지 말라. 공자가 자공을 아끼긴 했지만 묵묵히 충서(忠恕)의 정신에 충만했던 안회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사진은 중국 사이트에서 찾은 은주왕 자수신의 상상도입니다. 제가 상상한 자수신의 이미지와 비슷해 가져와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