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편 자장(子張) 제19장
맹씨가 양부(陽膚)를 재판관으로 삼았다. 양부가 증자에게 가르침을 청하니 증자가 말했다. “윗사람이 도리를 잃어 백성이 흩어진 지 오래다. 만일 죄를 저지른 정황을 이해하게 됐다면 불쌍히 여길지언정 (죄인을 벌한다 하여) 기뻐하지 말라.”
孟氏使陽膚爲士師, 問於曾子. 曾子曰: 上失其道, 民散久矣. 如得其情則哀矜而勿喜.
맹씨사양부위사관 문어증자 증자왈 상실기도 민산구의 여득기정즉애긍이물희
공자시대의 노나라는 삼환(三桓)으로 불린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 세 가문이 정권을 농단하던 시기였습니다. 삼환이란 별칭은 '노환공(희윤)의 세 자손'이란 뜻에서 생긴 겁니다. 노환공은 이웃한 제나라를 방문했다가 살해됩니다. 어이없게도 그 아내인 문강이 이복 오라비인 제양공(강제아)과 불륜관계임을 알고 분개해 문강을 끌고 노나라로 돌아가 처벌하려 하자 당황한 제양공이 역사 팽생을 보내 압살해버린 겁니다.
이 패륜적 스캔들로 노나라는 대혼란에 빠집니다. 노환공의 맏아들인 노장공(희동)이 제후의 지위를 잇는데 그 어머니가 바로 문강입니다. 당연히 정통성의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강은 제나라와 노나라 국경지대에 머물며 제나라를 등에 업고 노장공을 원격으로 조종합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오빠이자 연인인 제양공의 딸이자 조카딸인 애강을 노장공과 혼인시키는 초강수를 둡니다. 아버지를 죽인 원수의 딸을 정비로 삼아야 했던 노장공이 애강을 멀리하자 애강은 노장공의 이복동생 희경보와 바람을 피워 또 다른 피바람을 몰고 옵니다.
노장공에겐 배다른 동생이 셋 있었습니다. 희경보, 희아, 희우로 모두 서자였습니다. 당시 주나라에서 서자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희라는 성(姓)과는 별도로 다른 씨(氏)를 써야 했습니다. 이들은 각자 첫째 둘째 셋째를 뜻하는 맹손(처음엔 중손), 숙순, 계손을 씨로 삼았고 경(卿)의 반열에 올라 노나라의 실권자가 됩니다.
이들 삼 형제는 노장공이 적장자 없이 죽자 그 후계 자리를 놓고 골육상쟁을 벌이다가 결국 세 가문이 정족지세(鼎足地勢)를 이루며 300년 간 노나라를 분할 통치하게 됩니다. 서열은 제일 밑이지만 세력이 가장 컸던 계손씨의 종주가 사도(司徒), 숙손씨의 종주가 사마(司馬), 맹손씨의 종주가 사공(司空)을 도맡았습니다. 사도, 사마, 사공은 삼공(三公)으로 불린 국가 최고위직입니다.
논어에서 이들 가문은 계씨, 숙씨, 맹씨로 불리며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삼환정치는 공자의 살아있을 때는 물론 그가 죽고 난 뒤에도 60년 넘게 노나라를 속박한 한계상황이었습니다. 본문에 언급되는 맹씨는 그 삼환 중 맹손씨 가문을 뜻합니다. 삼환 중에서 맹손씨 가문 사람들이 공자의 제자로 예를 배웠습니다. 맹의자(중손하기)와 남궁경숙(중손멸) 형제가 대표적입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증자의 제자인 양부가 맹손씨 가문의 가신으로 재판을 관장하는 사사(士師)로 발탁되자 스승인 증자에게 어떤 자세로 공직에 임할지를 묻고 증자가 답한 내용입니다. 윗사람의 잘못으로 아랫사람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으니 판결을 할 때 이를 잘 살펴서 불쌍히 여길 것이며 높은 자리에 올라 누군가를 재판한다 하여 뻐기지 말라는 경계를 줍니다. 이는 서로가 서로를 못 믿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식의 보복으로 점철됐던 삼환정치에 대한 뼈 있는 비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본명이 증참(曾參)인 증자는 공자보다 45세나 어린 말년 제자입니다. 자는 자여(子輿)입니다. 부친인 증점(曾點)의 대를 이어 16세부터 공자의 제자가 됐는데 효자로 유명했습니다. 공자가 숨질 때 나이가 27세였으니 10년 이상 그 문하에 있었던 셈입니다. 자하, 자유, 자장과 동년배이지만 자장과 함께 공문십철엔 들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공자가 대놓고 노둔하다고 평한 바 있음에도 비중 있는 조연으로 ‘논어’에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증자는 ‘논어’에 등장하는 공자의 제자 중 스승을 뜻하는 자(子) 호칭이 붙은 소수의 인물 중 하나입니다. 이 때문에 ‘논어’가 편집될 당시 증자 제자들 입김이 컸을 거란 추론이 나옵니다. 공자의 손자이자 유교 경전 4서의 하나인 ‘중용(中庸)’의 저자인 자사(공급)의 스승이란 점도 증자의 존재감을 부각시켰습니다. 공자-증자-자사-맹자(孟子)로 이어진 도통론의 징검다리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입니다.
공자의 학문을 개인차원의 수제학(修齊學)과 정치 차원의 치평학(治平學)으로 나눌 때 증자는 수신학 그중에서도 주로 효(孝)와 충서(忠恕)에 경도된 경향을 보입니다. 공자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우둔한 효자라고 비판했지만 후대로 갈수록 효자의 대명사로 불리게 됐습니다. ‘효경(孝經)’을 그가 집필했을 것이란 추론도 그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지만 수직적 서열관계를 합리화하는 데 치중해 후대 유교를 보수화한 원흉 중 하나라고 비판됩니다.
뒤에서 더 살펴보겠지만 증자의 가르침은 평이하거나 진부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증자를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제자와 형평성을 위해 앞으로 이 책에선 그의 자인 자여로 호명할 예정입니다.
그나마 이 구절은 백성의 죄는 윗사람들의 책임이 크므로 불쌍히 여기라는 대목이어서 곱씹어볼 만합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우리 속담의 연장선상에 있다고나 할까요? 특히 '벌준다고 통쾌해하지 말고 죄지은 자를 긍휼히 여기라'는 대목은 흉악범죄자만 나오면 그 행위만 놓고 온갖 비난과 욕설로도 부족해 집단폭행까지 불사하는 현대인의 소아병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죄인을 악마화하는 것은 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윤리적 문제로 귀결시킨다는 점을 다들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여의 제자 양부(陽膚)는 ‘논어’에서 이 대목에 딱 한번 등장하는 데다 다른 사서에도 그 이름이 보지지 않습니다. 스승을 잘 만나 이름 두자를 역사에 길이 남긴 특이한 인물입니다.
*사진은 잘못된 판결 결과를 뒤엎은 재심 사건을 다룬 SBS 드라마 '날아라 개천룡'에서 삼례오거리 사건을 극화한 내용에서 진범이 자신의 범죄임을 입증하며 오열하는 장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