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편 자장(子張) 제18장
증자가 말했다. “내가 스승님께 들으니 맹장자의 효는 다른 것은 능히 할 수 있다 해도 그가 아버지의 신하와 아버지의 정책을 바꾸지 않은 것은 능히 하기 어렵다고 하셨다.”
曾子曰: "吾聞諸夫子, 孟莊子之孝也, 其他可能也, 其不改父之臣與父之政, 是難能也."
증자왈 오문저부자 맹장자지효야 기타가능야 기불개부지신여부지정 시난능야
앞서 ‘노환공의 서자 3형제’의 가문인 맹손(孟孫), 숙손(叔孫), 계손(季孫)이란 세 씨족 가문을 삼환(三桓)이라 불렀는데 공자가 살던 시대 전후로 300년간 노나라의 정치를 좌지우지했다고 설명드렸습니다. 이들은 ‘논어’에서 맹씨, 계씨, 숙씨로 등장합니다. 이중 계손씨가 세력이 가장 컸고 맹손씨와 숙손씨가 힘을 합쳐 그를 견제하는 형국이었습니다. 공자와 그 제자들은 삼환을 모두 비판했지만 그래도 맹손씨 가문 인사에겐 한 수를 접어줬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공자의 아버지인 공흘(孔紇·보통 숙량흘이라고 부름)이 맹손씨 가문의 5대 종주였던 맹헌자(孟獻子)를 주군으로 모신 무사였습니다. 맹헌자는 집안을 내세우지 않고 덕으로 벗을 사귀었다고 상찬 받는 대목이 ‘맹자’에 등장합니다. ‘대학’에서도 ‘백대 이상의 전차를 동원할 수 있는 제후라면 마땅히 가혹하게 세금을 거두는 자를 신하로 두느니 차라리 도적질을 일삼는 자를 신하를 둘 것’이란 일갈을 남긴 인물로 등장합니다. 벗을 사귐에 귀천을 두지 않았고, 인정머리 없는 사람을 기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니 군자라 부를 만합니다.
맹장자는 그 맹헌자의 맏아들로 40년 넘게 종주 역할을 수행한 아비의 뒤를 이어 맹씨 가문의 6대 종주가 된 인물입니다. 공자가 태어날 무렵을 전후해 종주가 된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3년 상을 치르며 아버지가 선발한 신하와 아버지의 정책을 바꾸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게 왜 엄청난 효자의 징표라는 걸까요?
‘논어’에는 아버지의 정책을 최소 3년간 바꾸지 않는 것을 효로 본다는 구절이 세 차례나 등장(1편 '학이' 제11장과 4편 '리인' 제20장)합니다. 공자의 논리는 효성스러운 군주라면 3년상을 치르듯 아비의 인사와 정책을 최소 3년은 지켜보면서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견 설득력이 있습니다. 더욱이 공자가 이상향으로 삼았던 상고시대의 전통에는 오랜 세월에 걸친 지혜가 온축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 깊은 뜻을 곰곰이 살피지 않고 인사와 제도에 손을 댔다가 낭패를 보기 십상이었을 겁니다. 이를 염두에 두면 음미할만한 대목입니다.
특히나 그 아버지가 맹헌자처럼 현명하고 경험이 풍부한 지도자라면 설사 당장 문제가 있어 보이더라도 그 뜻을 헤아려보고 현실 적합성을 따져보는 숙려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아비가 폭군이나 암군(暗君)이어서 그 잘못된 인사와 정책으로 인해 신음하는 백성이 속출하고 있는데도 이를 계속 지켜보고만 있는 게 옳을까요? 300여 개의 제후국이 치열한 생존경쟁을 549년간 벌여야 했던 춘추전국시대에 그런 선택이 옳을까요? 더군다나 이는 ‘잘못임을 알고도 고치는 것을 꺼려하지 않아야 군자’라는 공자의 말과도 배치됩니다.
자여(증자)가 노둔하다는 것이 여기서도 발견됩니다. 그 아비가 맹헌자 같은 빼어난 인물이었기에 맹장자의 선택이 효로 간주될 수 있다는 특수성을 간과한 것입니다. 그래 놓고선 무조건 아비의 인사와 정책을 바꾸지 않는 것이 진정한 효라는 일반론으로 논리적 비약을 감행해버린 겁니다. 그 결과 현왕은 선왕의 인사와 제도를 최소 3년은 무조건 고쳐선 안 된다는 것이유교국가의 금과옥조가 돼버린 겁니다. 이 역시 치평(治平)보다 수제(修齊), 그중에서도 효를 앞세운 바람에 공자의 가르침을 마치 앙시앵 레짐을 옹호하는 학문처럼 만들어버린 자여의 폐해입니다.
공자가 꿈꾼 군자는 도덕적 주체와 정치적 주체 그리고 종교적 주체를 하나로 합일한 존재였습니다. 종교와 도덕, 정치가 삼위일체로 구현된 이상적 존재가 곧 군자였던 겁니다. 따라서 군자는 조상에 대한 제례의 전문가이자 삼강오륜의 담지자이며 예약으로서 백성을 교화하는 실천가여야 했습니다. 문제는 이 셋을 통합하는 작업이 섬세하고도 지난하다는 데 있었습니다. 그 셋을 단순 등치 시켜버리는 순간 어느 하나가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해버리는 국가적 재앙이 초래되고 맙니다. ‘논어’는 이 문제를 풀어내기 위한 공자와 제자들 간의 토론의 산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노둔했던 자여는 그 복잡다단한 매듭을 섬세하게 풀어가려 한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성급한 일반화로 치달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사진은 문묘에 배향된 자여의 초상입니다. 노나라 태생이지만 조상의 본관을 따서 성국(郕國)이란 작은 나라의 공작 자위의 제후로 추봉됐습니다. 본디 공문10철 안에도 못들었던 그가 남송 이후 안연, 자사, 맹자와 더불어 '4성(四聖)'으로 엄청난 월반을 하며 '종성(宗聖)'이란 시호까지 받습니다. 공자의 시호는 '지극한 성인'이라는 듯의 지성(至聖)이지만 '시조가 되는 성인'이란 뜻의 조성(祖聖)도 됩니니다. 종성이란 시호는 그런 공자와 더불어 조종(祖宗)이 되는 성인이란 뜻입니다. 그래서 '성국(郕國) 종성공(宗聖公)'이란 존호가 붙었고, 이름인 증참(曾參)과 자인 자여(子輿)가 함께 병기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