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편 자장(子張) 제17장
증자가 말했다. “내가 스승님께 들으니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지극함을 다하기 어려운 법이지만 부모상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하셨다.”
曾子曰: "吾聞諸夫子 '人未有自致者也 必也親喪乎.' "
증자왈 오문저부자 인미유자치자야 필야친상호
역시 효를 중시한 자여(증자)다운 발언입니다. 사람이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하지만 부모상을 당했을 때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야 하며 그 슬픔을 상례로 승화시키는데 부족함이 없어야 함을 강조합니다.
흥미로운 점은 공자가 효를 말할 때와 그 제자들이 효를 말할 대 온도 차이가 크다는 점입니다. 공자는 3년상을 지키란 것과 부친 사후 3년 동안은 그 정책을 고치지 말라는 두 대목을 빼면 그 마음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자식을 아끼는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보라거나 그에 값하는 마음가짐과 행동거지를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자여를 필두로 그 제자들에 이르면 부모가 죽었을 때 상례에 집중됩니다. 공자는 내용을 강조했는데 제자들은 형식을 강조한다고나 할까요. 그 선두에 '천하제일 효자'로 불린 자여가 서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공자가 효자로 꼽은 사람은 자여가 아니라 민자건입니다. 공자와 같은 노나라 출신으로 공자보다 열다섯 어렸습니다. 본명은 민손(閔損)이고 자가 자건(子騫)이었는데 '논어'에는 민자건으로 표기됩니다. 공자가 자신의 제자 중에서 딱 10명(공문십철)을 꼽을 때 공자는 덕행을 기준으로 네 사람을 뽑습니다. 그 첫 번째가 안연(안회)이고 그다음이 민자건이었습니다. 또한 “효자로다, 민자건!”이라 경탄했을 만큼 효행에 있어선 으뜸으로 여겼습니다. 실제 민자건에 대한 공자의 평가는 부정적 이야기가 단 하나도 없이 찬사 일색입니다. 반면 자여에 대해선 “부모 진심을 헤아리지 못하는 고지식한 놈”이라거나 “둔한 놈”이라는 비판이 더 많습니다.
아쉽게도 민자건은 공자보다 8년 앞서 50세의 나이에 숨을 거뒀습니다. 그래서 변변한 제자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반면 공자보다 45세나 어렸던 자여는 스승의 사후 노나라에서 공문 출신 중 가장 많은 제자를 길러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마땅히 자건이 누려야 할 자리를 자여가 꿰찬 겁니다. 그 학맥이 자사와 맹자를 거쳐 송나라 때 주자로 이어지면서 자여의 위상은 눈덩이처럼 커집니다. 그 결과 공자의 사당인 문묘(文廟)에서 공자와 안연 다음의 '넘버3' 자리까지 차지하게 됩니다. 유학이 동아시아 왕정과 결탁한 보수화의 길을 걷는 것과 자여의 위상이 높아지는 것이 정비례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공자의 제자라는 표현은 아우 제(弟)와 아들 자(子)의 합성어입니다. 제는 공자보다 대략 나이차가 대략 30세 이하였던 자로, 자건, 백우(염경), 중궁(염옹), 염유(염구), 안연 등을 말합니다. 정확히 31세 나이차가 났던 자공은 제계열의 마지막 제자라 할 수 있습니다. 자는 그 이상 나이차가 났던 자하, 자유, 자여, 자장 등을 지칭합니다. 자계열 제자 중 최연장자는 공자보다 33세 연하였던 유약입니다. 어떤 분들은 논어 11편 선진 제1장에 등장하는 표현을 빌려 전자를 선진(先進), 후자를 후진(後進)으로 분류하시던데 이는 오류입니다.
선진 편 제1장에 등장하는 선진은 공자가 이상향으로 삼았던 주나라 초기를 뜻하고 후진은 공자가 살던 춘추시대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공자가 세련됐지만 얄팍한 후진이 아니라 순박하지만 속 깊은 선진을 따르겠다고 했으니 결코 공평한 표현이 될 수 없습니다. 다만 공자 제자 중에 민자건과 자여만을 놓고 비교한다면 민자건이 선진이요, 자여는 후진이라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듯합니다. 공자가 진심으로 인정한 효자는 민자건이었지 자여가 아니었으니까요.
*사진은 중국의 문묘에 배향된 민자건의 초상입니다. 그의 고향이 노나라 비읍(費邑)으로 삼환 중 계손씨의 종주가 그를 비읍의 읍재(邑宰)로 삼으려 하자 이를 극구 거부했다는 기록이 '논어' 에 나옵니다. 이를 토대로 당나라 현종 때 그를 '비의 후작'라는 뜻의 비후(費侯)에 봉해졌고 송나라 때 '비의 공작'이란 의미로 비공(費公)으로 한 단계 더 높이 추증됐습니다. 그래서 '비공 민손 자건(費公 閔損 子騫)'이란 존칭이 붙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