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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Jan 19. 2021

공자 제자들이 가장 질투한 사내

19편 자장(子張) 제16장

  증자가 말했다. “당당하구나, 자장은! (하지만) 그와 함께 어짊을 실천하기는 어렵구나.”     

  

  曾子曰: "堂堂乎張也! 難與竝爲仁矣."

  증자왈   당당호장야   난여병위인의

 


   논어가 자여(증자)-자사 계열의 제자들에 의해 편집됐을 가능성이 컸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자장은 논어에서 공자에게 최후의 질문(“정치에 종사한다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을 던진 제자인 동시에 19편의 제목으로 뽑힐 만큼 주요 등장인물입니다. 하지만 이 장에서처럼 선배나 동료 제자로부터 “어질다고 하기엔 부족하다”는 공격의 대상이 됩니다. 공자 제자 중에서 가장 많이 질투와 시기를 받은 '문제적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스승인 공자의 비판은 이해할만한데 동문수학한 도반들의 비판까지 수록한 이유는 도대체 뭘까요?

  

  앞서 언급했듯 자장은 공자보다 마흔여덟이나 어린 ‘자(子)’에 해당하는 제자입니다. 본명은 전손사(顓孫師), 성이 전손이고 이름이 사(師)입니다. 자공은 성이 단목(端木)이고, 이름은 사(賜)입니다. 한자는 다르지만 한글로 발음이 똑같아 공자가 “사야!”라고 이름만 부를 때 헷갈리게 만드는 제자입니다.  

    

  이름만 비슷한 게 아닙니다. 총명함과 그에 대한 자부심도 도드라져서 스승으로부터 망치질당하는 것도 닮았습니다. 약소국 출신인 점도 비슷합니다. 공문의 주류였던 노나라 출신은 아니지만 자공이 북방 강대국 진(晉)나라와 제(齊)나라 사이에 낀 위(偉)나라 출신이듯 자장은 남방 강대국 초나라에 끊임없이 시달린 진(陳)나라 출신이었습니다. 진나라는 초나라의 침공으로 제후가 추출당하고 (초나라의) 일개 현으로 전락하는 ‘멸국치현(滅國置縣)’을 세 차례나 겪은 끝에 기원전 478년 멸망했습니다. 공자가 숨지고 1년 뒤이니 자장의 나이 스물다섯 때입니다.       


  사실 자장에 대해선 진나라 왕족설과 노나라 비천한 출신설이 엇갈립니다. 진나라는 순임금의 후손으로 주무왕의 맏사위인 규만(嬀満)에게 봉작된 나라입니다. 따라서 그 적손이라면 성이 규(嬀)여야 합니다. 진나라 멸망 후엔 그 후손이 나라 이름 진(陳)을 성씨로 삼았습니다. 따라서 전손이란 성을 쓰는 자장이 진나라 공실의 방계일 순 있어도 적통이 되긴 어렵습니다. 그래도 여생을 망국의 설움을 안고 살아야 했겠지요.  

   

  전국시대 때 여불위 주도로 편집된 ‘여씨춘추’에는 자장이 ‘노나라의 비루한 가문 출신(魯之鄙家)’이란 내용이 나옵니다. 이를 근거로 자장이 비루한 가문 출신임에도 공자의 가르침으로 대성했다는 스토리텔링도 만들어졌습니다. 위진시대 편집된 ‘공자가어’에는 사형인 자공의 자장 평가가 나옵니다. “아름다운 공로가 있어도 자랑하지 아니하고, 귀한 지위에 올라도 잘한다고 여기지 아니하며, 남을 업신여기거나 안일에 빠지지 아니하고, 기댈 때 없는 이들에게 거만하게 굴지 않았다.” 자공처럼 자장 역시 스승의 절차탁마의 가르침을 체현해내 말년에 ‘승당입실(升堂入室)의 경지'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 출신과 스승 사후의 행로를 떠나서 ‘논어’에 등장하는 자장은 ‘제2의 자공’이라 부를 만합니다. 공자에게 항상 핵심적 질문만 골라 던지고 수제보다는 치국에 관심이 많습니다. 또 공자로부터 “재주가 너무 과하다”는 핀잔 섞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앞서 보셨듯이 스승이 숨지기 직전 최후 인터뷰에 선발로 발탁될 정도로 공자학단에서도 총명함을 인정받았고 스승의 귀염도 담뿍 받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당당하구나, 자장은!”이란 표현에 이 같은 사연이 농축돼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스승의 사후 공문이 여러 학파로 나뉠 때 가장 막내면서도 꽤 두각을 나타내자 라이벌 관계였던 자유와 자여 등의 견제를 심하게 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자공과 세트로 엮여서 재승박덕(才勝薄德)의 이미지가 구축된 게 아닐까요? 또 자공은 공문 중 가장 입신출세했기에 제자를 키우기보다는 공문 전체에 대한 재정적 지원에 치중했기에 아무런 사심 없이 자장을 평가할 수 있지 않았나합니다. 저는 사람 보는 눈이 날카로웠던 자공의 편에 서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대목에선 발언당자사인 자여에게 이런 말을 보태주고 싶습니다. "부러워하면 지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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