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편 자장(子張) 제15장
자유가 말했다. “내 친구 자장은 어려운 일을 능숙하게 처리하지만 어질다고 하기엔 이르다.”
子遊曰: "吾友張也, 爲難能也, 然而未仁."
자유왈 오우장야 위난능야 연이미인
자장을 공격하는 또 다른 제자가 등장합니다. 공문십철에 포함된 자유(子游)입니다. 본명은 언언(言偃). 공자 제자 중 드물게 남방계인 오나라 출신입니다. 오나라는 현재의 장쑤성 쑤저우(蘇州)를 중심으로 한 나라였습니다. 공자보다 마흔다섯 어렸으니 ‘자(子)’에 속한 제자였습니다. 사마천의 ‘중니제자열전’에 따르면 자하 보다 한 살이 어리고, 자여(증자)와는 동갑, 자장 보단 세 살이 많았습니다.
공자 제자 중 성년 이후 부여되는 이름인 자(字)가 자유인 인물이 셋이나 됩니다. 한자로 자유(子游)는 언언, 자유(子有)는 염구와 유약입니다. 후자의 경우 서로 구별하기 위해 나이가 네 살 더 많은 염구는 성을 붙여 염유라 부르고 유약은 자가 아니라 본명을 부르거나 유자(有子)라는 경칭으로 등장합니다. 인터넷에 가끔 자유(子由)라는 정체불명의 자가 불쑥 등장할 때가 있는데 공자 제자 중에 이런 자를 쓰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유(子由)는 송나라 때 시인 소동파(소식)의 동생 소철의 자가 가장 유명합니다.
공자가 자신의 제자 중 특별히 열 명을 언급할 때 자유는 자하와 더불어 문학에 뛰어나다고 평했습니다. 당시 문학이라 함은 시(詩)와 악(樂)을 포함한 고전에 대한 이해를 말합니다. 당시 시는 노래에 가까웠고 악은 거문고로 대표되는 다양한 악기 연주를 말했습니다. ‘논어’에는 자유가 뛰어난 거문고 연주자이며 노나라에서 읍재가 됐을 때 백성들에게 시악을 가르쳤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원래 남방에 위치한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 사람들은 음악에 능했습니다. 중국 고대 시인으로 ‘어부사’와 ‘이소(離騷)’란 절창의 시가를 남긴 굴원(본명 굴평)이 초나라 사람이요, 역시 초나라 출신인 항우와 관련한 고사성어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등장한 게 괜한 것이 아닙니다. 굴원의 ‘이소’에는 요순시대와 은탕왕, 주문왕 시대를 상찬하면서 선비의 지조를 노래합니다. 공자의 영향이 뚜렷하므로 굴원을 유가에 속하는 인물로 봅니다.
그렇다면 맹자, 장자와 동시대인인 굴원은 어떻게 공자의 학맥을 접하게 됐을까요? 초나라와 오나라, 월나라는 그 언어조차 중원과 달랐다 할 정도로 이국적 풍습의 나라였습니다. 게다가 초나라는 도가를 창시한 노자(노담)의 고향으로 지목될 정도로 도가의 전통이 강했습니다. 공자가 천하주유를 할 당시 도가 전통의 은자(隱者)를 많이 만나는 곳 또한 초나라 접경지대입니다. 훗날 초한지의 주인공이 되는 항우와 유방 역시 초나라 출신입니다. 항우가 건국한 한나라 때 도가 전통의 황로학이 크게 유행한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봐야 합니다.
양쯔강 이남(강남)에 유가의 씨앗이 뿌려진 것을 크게 두 경로에서 찾습니다. 첫째는 공자가 천하주유하면서 초나라에 머물 때 키운 제자군에서 나왔다는 시각입니다. 훗날 맹자와 논쟁을 벌인 초나라 출신 허행(許行)과 진상(陳相)과 같은 학맥이란 주장입니다. 하지만 허행과 진상은 농업을 전파한 신농씨를 우상화하고 임금도 백성과 함께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농가(農家) 사상을 펼쳤는데 동시대인인 굴원의 시에선 그런 농가 사상이 엿보이지 않습니다.
둘째는 강남 지역에 학당을 열어 ‘남방의 공부자’라는 뜻의 ‘남방부자(南方夫子)’로 불린 자유의 학맥을 이었다는 시각입니다. 자유의 본국인 오나라는 공자가 죽고 6년 뒤인 기원전 473년 멸망해 월나라에 흡수됩니다. 자유의 나이 서른셋 때입니다. 월나라의 국력은 이때를 정점으로 점차 쇠퇴해 기원전 306년 패망하면서 초나라에 흡수됩니다. 자유가 이미 숨진 뒤이긴 하지만 자유가 뿌린 씨앗이 강남지역에서 맺은 열매가 굴원이란 시각이 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남방 공자’로 불릴 만큼 존경받던 자유는 뭐가 아쉬워 한때 도반이었던 자장을 비판하고 나섰을까요? 공자 사후 3년상을 치르고 난 뒤 공자 학단의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집니다. 자공처럼 관직에 진출한 사람도 있지만 대다수는 학당을 연 것으로 보입니다. 강남지역에 자유가 있었다면 노나라에선 유약과 자여가 있었습니다. 자하는 전국시대 들어 중원의 진(晉)나라가 쪼개져 성립한 3개 국가 중 위(魏)나라에서 위문후의 스승까지 되며 성공적으로 제자를 키워냈습니다. 그리고 자장이 있었습니다.
공자가 죽고 200년쯤 뒤인 기원전 3세기 한나라 왕족 출신의 한비자가 쓴 ‘한비자’의 현학 편을 보면 유가가 크게 8대 문파로 나뉜다고 소개돼 있습니다. 자장(子張) · 자사(子思) · 안씨(顔氏) · 맹씨(孟氏) · 칠조(漆雕) · 중량씨(仲良氏) · 손씨(孫氏) · 악정씨(樂正氏)입니다. 이를 팔유(八儒)라고 부르는데 그 첫머리에 등장할 정도로 자장의 영향력이 막강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사는 공자의 손자인 공급을 말합니다. 안씨는 공자가 가장 아꼈지만 40대 중반에 숨진 안연(顔淵)의 학맥을 계승한 학파로 추정됩니다. 맹씨는 의심의 여지없이 맹자(맹가)를 지칭합니다. 칠조는 공자의 제자 중 덕행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은 칠조개로 추정됩니다. 손씨는 순자(荀子·순경)를 말합니다. 순(荀)과 손(孫)의 옛 중국어 발음이 같아 통용됐는데 순자에 대한 경칭이 손경자(孫卿子)였습니다. 중량씨와 약정씨는 불분명합니다. 다만 중량씨는 ‘예기’에 짤막하게 등장하는 자여의 제자 중량자(仲梁子)라는 설과 약정씨는 맹자의 제자인 약정자(약정극)라는 설만 있을 뿐입니다.
‘한비자’에서 손씨로 거명된 순경이 쓴 ‘순자’의 비십이자(非十二子) 편을 보면 제자백가 중 열두 명의 사상가에 대한 비판이 등장합니다. 여기에는 순경이 속한 유가 사상가 두 명이 포함돼 있습니다. 공자와 중궁(염옹)의 도를 곡해한 속유(俗儒)라고 맹공을 퍼붓는 자사와 맹자입니다. 십이자에 대한 비판을 마치고 난 뒤에는 천박한 유가라 하여 ‘천유(踐儒·천박한 유가)’로 비판받는 3명이 등장하는데 차례로 자장, 자하, 자유입니다. 여기서도 자장이 첫 번째로 언급됩니다.
‘한비자’와 ‘순자’를 종합해보면 공자 학맥은 넷에서 여덟으로 나뉩니다. 공자의 고향으로 유가의 본고장인 노나라를 거점으로 삼은 안연, 자사, 맹자, 중량씨, 약정씨 학파는 범(凡) 자여 계열로 묶을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 북방의 진(晉)나라와 제(齊)나라를 거점으로 삼은 자하 계열이 있습니다. 순자가 이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봅니다. 세 번째 남방의 오, 월, 초를 거점으로 삼은 자유 계열이 있습니다. 순자의 제자였던 한비자가 분류한 팔유에는 자유의 학맥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선 전국시대 말기엔 그 학맥이 끊겼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정확히 그 거점이 어디인지는 불분명하지만 가장 세력이 컸던 자장 학파가 있습니다.
자장이 죽고 200년 뒤에도 그 영향력이 이처럼 막강했으니 그가 살아있을 땐 오죽했을까요? 그러니 천하제일의 효자이자 죽는 순간까지 예의 실천을 중시했던 자여와 남방 공자로 불릴 만큼 예와 문학에 밝았던 자유가 “유능하긴 한데 어질진 못하다”고 직접 견제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게 아닐까 합니다. 하지만 스승이 아무리 출중하다고 해도 제자를 잘 만나지 않으면 후대에 이름을 남길 수 없는 법. 자장 학파에선 자장에 버금가는 제자를 배출하지 못하면서 학맥이 끊어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뒤 제자백가의 책을 불태워버리는 분서갱유 때 그 가르침을 담은 저술조차 살아남지 못하는 불운을 겪으면서 철저히 잊힌 학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장이야말로 ‘비극적 낭중지추’라고 부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진은 대만고궁박물관 소장 자유의 초상입니다. 그가 춘추시대 오나라 출신이라 원나라 때 '오공(吳公)'으로 추증됐고 이름은 언언, 자가 자유라 '吳公 言偃 子游' 라고 한자로 병기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