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편 자장(子張) 제14장
자유가 말했다. “상을 당했을 땐 슬픔을 다하되 그칠 줄 알아야 한다.”
子遊曰: "喪致乎哀而止."
자유왈 상치호애이지
유가는 제례와 상례를 다루는 일에서 시작된 학파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맹모삼천지교의 고사에서 맹자가 처음 살던 집이 묘지 근처라 장사 지내는 흉내를 냈다는 내용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찍부터 유가의 영재가 될 싹수를 보였다는 암시가 담겼기 때문입니다. 사마천의 ‘공자세가’에 따르면 공자도 어린 시절부터 각종 제기(祭器)를 늘어놓고 제사 지내는 소꿉장난을 즐겼다고 합니다. 어린 시절부터 두 사람의 주파수가 맞았던 거죠.
그래서 전국시대의 유가 비판을 보면 대부분 겉으론 예의를 따지며 고고한 척 하지만 뒤로는 도굴꾼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난무합니다. 제사상을 차릴 때부터 ‘감 놔라 배 놔라’ 온갖 지적질만 해대다가 제례와 상례가 끝난 뒤에 그 제사상의 주인공 무덤을 파서 부장품을 훔쳐 먹고 산다는 것이지요. 이런 비난이 쇄도한 것은 유가가 뭐가 격식에 맞냐 아니냐를 따지는데 과하게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 국왕의 어머니 상이 3년상이 맞느냐 1년상이 맞느냐를 두고 사생결단 당파싸움이 벌어진 것이 유구한 전통을 자랑한다는 말입니다.
공자의 제자를 제(弟)와 자(子)로 나누는 것은 세대적 구별입니다. 앞서 또 다른 기준을 말씀드렸습니다. 공자가 가르친 군자학 중에 어떤 것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수제(修齊)파와 치평(治平)파로 나눌 수 있다고. 송대 성리학자들은 이를 다른 각도에서 분류했습니다. 예를 다룸에 있어 내면의 진정성을 중시하느냐 외적 형식의 완성을 중시하느냐에 따라 내성(內聖)파와 숭례(崇禮)파로 나눌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용어에서 드러나듯 당연히 내적으로 성인의 도를 갈고닦는 게 더 중요하겠죠? 그래서 자여(증자)-자사-공자로 이어지는 내성파가 정통이고 자하-자유-자장을 거쳐 순자로 이어지는 숭례파는 곁가지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펼쳤습니다.
그럼 과연 자하, 자유, 자장은 예의 실천만 중시했을까요? 여기 자유의 발언이 그렇지 않음을 입증해 줍니다. 상을 당했을 때 예의를 따지기에 앞서 슬픔의 표출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것이 지나쳐 몸이 상할 정도가 되어선 안 되기에 적당한 수준에서 그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한 것입니다. 이 대목을 ‘지극한 슬픔을 표하면 그뿐’으로 새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자든 후자든 내면의 슬픔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자유를 과연 숭례파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여야말로 예에 죽고 예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말년에 병석에 누워 오락가락할 때 어린 제자 중 한 명이 그의 침대가 대부용으로 제작된 것이라 너무 화려한 것 아니냐 하는 핀잔 섞인 혼잣말을 했습니다. 이를 들은 자여는 “네 말이 맞다. 대부가 아닌 내가 이 침대에서 죽을 순 없는 노릇이지”라며 침대를 바꾸는 소동을 벌이다가 숨을 거뒀다고 합니다. 과연 누가 진짜 숭례파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