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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펭소아 Jan 25. 2021

공자의 문학적 열매, 자하

19편 자장(子張) 제13장

    

  자하가 말했다. “벼슬 살 때는 틈나면 학문을 닦고, 학문을 닦다가 여유가 생기면 벼슬 산다.”     

  子夏曰: "仕而優則學, 學而優則仕."     

  자하왈    사이우즉학   학이우즉사



   공자 제자 중에서 최고의 명언제조기 자하(子夏)가 등장했습니다. 자하가 여기서 말한 사인(士人)의 삶은 송나라 유학자들에 의해서 사대부 삶의 원형이 됩니다. 즉 평소엔 학문을 연마하다가 벼슬길이 열리면 사양하지 않고 국가에 봉사하되 관직에 있으면서도 틈틈이 학문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대부의 삶은 그렇게 수양(修養)과 출사(出仕)라는 두 바퀴로 굴러간다는 것이지요.     


    본명이 복상(卜商)인 자하는 공자보다 마흔넷이 어렸으니 ‘자(子)’ 계열 제자에 속합니다. 자유와 함께 문학에서 일가를 이뤘다는 공자의 상찬을 받아 공문십철 중 한 명으로 꼽힙니다. 당시의 문학은 예악(禮樂)과 시문(詩文) 및 그 전거가 되는 고문(古文)과 역사에 두루 정통한 것을 말합니다. 


  남방 오나라 출신인 자유가 음악에 더 앞섰다면 북방 진(晋)나라 출신인 자하는 시문에 좀 더 능숙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공자도 “함께 시를 논할 만하다”라고 그 문재(文才)를 아꼈습니다.  실제 ‘논어’에 기록된 자하의 말은 문학성이 풍부해 후대에도 많이 인용되는 명언이 많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하를 공문(孔門)에 열린 '문학적 열매'라 부름직합니다. 

 

  자하는 공자 사후 자장, 자유, 자여(증자)와 더불어 4대 문파라 부를 만큼 많은 제자를 배출했습니다. 사실 살아있을 때를 기준으로 삼으면 자하의 존재감이 가장 두드러집니다. 공자 사후 춘추시대 5패로 뽑히던 북방의 강자 진(晋)나라가 조(趙) 위(魏) 한(韓) 3국으로 분열하게 됩니다. 자하는 이 중에서 위나라의 창업주이자 전국 7웅 중 가장 먼저 두각을 나타낸 위나라의 전성기를 이끈 위문후의 스승으로 발탁됐습니다. 


  위문후 아래서 재상으로 발탁된 이극(李克)과 서문표(西門豹) 그리고 불패를 자랑한 위나라 명장으로 ‘오자병법’의 저자로 알려진 오기(吳起) 같은 인재가 자하의 문하에서 줄줄이 배출된 영향이 커 보입니다. 자하는 위나라 서쪽의 강대국 진(秦)나라와 국경을 접한 서하(西河)에 주재해 서하선생으로 불렸다고 하는데 오기는 그 서하에 주둔하면 군사적 명성을 쌓았습니다. 그 오기에 대해선 자여의 제자였다가 갈라섰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공자는 14년간 천하를 주유하며 자신을 발탁해줄 군왕을 찾았으나 결국 실패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하는 스승의 못 다 이룬 꿈을 이뤘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위문후가 인재양성 차원에서 다양한 스승을 초빙한 탓에 유일한 왕사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공자가 꿈꿨듯 국정 전반을 이끄는 상경(上卿)의 반열에 이르진 못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공문에서 배출된 제자 중에 당대 최강대국의 왕사가 된 인물은 자하가 유일하다는 점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제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자하는 공자 필생의 역작인 노나라 역사서 ‘춘추’를 필두로 '시경', '서경' 등의 유교 경전을 후대에 전수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훗날 ‘춘추공양전’과 ‘춘추곡량전’이 집필된 것도 자하의 학맥을 이어 가능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학술적 열매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춘추’는 춘추사관이라고 알려진 도덕주의 역사관의 교본과 같은 역사서입니다. 역사를 항상 정파와 사파, 본류와 말류의 이분법을 적용하면서 정파와 본류 중심으로 역사를 재단합니다.      


  그럼에도 내면의 주관적 세계를 강조한 자여와 달리 예(禮)라는 그 객관적 형식을 존중했다는 딱지가 붙습니다. 맹자로 계승되는 내성파가 아니라 순자로 이어지는 숭례파라는 주장인데 이야말로 다분히 주희로 대표되는 송유(宋儒)의 주관적 평가에 불과합니다. 자여-자사-맹자만 정파이고 나머지는 사파라는 송유들의 그런 판단야말로 춘추사관의 전형입니다. 자하가 숭례파라는 주장은 그저 그가 맹자의 스승이 아니기에 그렇게 부를 뿐입니다.     


  자하의 학맥이 순자로 이어졌다는 것은 순자가 다양한 유가 학파를 종합했기에 그렇게 비칠 뿐입니다. 실제 ‘순자’ 비십이자편을 읽어보면 자하 문파에 대해서도 ‘천유(賤儒)’라는 비판이 어김없이 가해집니다. ‘의관을 바르게 하고 표정을 단정히 하되 우쭐대며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안 하면 바로 자하 씨의 천유들이다.’ 예의 객관적 형식만 중시했다는 자하 비판은 오히려 그 학맥을 계승했다는 순자에게서 나오는 모순이 발생합니다. 게다가 글 도입부에서 말한 것처럼 송대 이후 사대부의 삶을 단 한 줄로 꿰뚫는 촌철살인의 표현을 남긴 주인공도 바로 자하라는 점에서 불공정한 평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하는 스승인 공자와 공유하는 아픔도 겪었습니다. 아들을 먼저 떠난 보낸 것입니다. 공자의 외아들이던 공리(孔鯉)는 50세의 나이에 숨집니다. 공자는 한동안 식음을 전폐하며 슬퍼했습니다. 자하 역시 노년에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다가 눈이 멀었다고 합니다. 이 고사에서 유래한 2개의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아들 잃은 슬픔을 빛을 잃는 슬픔이라 하여 ‘상명지척(喪明之戚)’과 서하의 아픔이라고 하여 ‘서하지통(西河之痛)’입니다.   


  송대 유학자들은 이 역시 예에서 어긋난다며 비판했습니다. 앞서 자유는 “상을 당해선 슬픔을 다 하되 그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는데 식음을 전폐한 공자의 슬픔도 과하거늘 시력까지 잃은 자하는 말할 것도 없다는 겁니다. 공자 못지않게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했던 자하가 말년에 아들을 잃고 비탄에 빠진 것을 인간적 연민의 시선으로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과연 공자가 '어진 사람들'이라고 여겼을지 몹시 의문입니다. 



*사진은 대만고궁박물관 소장 자하의 초상입니다. 위문후의 스승을 지냈다 하여 당 현종 때 위공(魏公)에 추증됐고 본명이 복싱(卜商), 자가 자하(子夏)여서 위공 복상 자하(魏公 卜商 子夏)라는 한자가 병기돼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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