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편 자장(子張) 제12장
자유가 말했다. “자하의 어린 제자들은 청소와 손님접대,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은 괜찮지만 이는 지엽적인 일이다. 본질이 빠졌으니 어찌 된 일인가?”
자하가 듣고서 말했다. “아, 자유가 잘못이로다. 군자의 도 중 무엇을 먼저 가르치고 무엇을 나중에 전해야겠는가? 초목에 비유하자면 풀일 때와 나무일 때를 구별해야하지 않겠는가. 군자의 도를 말하면서 어찌 함부로 무고한단 말인가? 시작과 끝을 한 번에 갖춘 사람이라면 그것은 이미 성인(聖人)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子游曰: 子夏之門人小子, 當灑掃應對進退, 則可矣, 抑末也. 本之則無, 如之何?
자유왈 자하지문인소자 당쇄소응대진퇴 즉가의 억말야 본지즉무 여지하
子夏聞之, 曰: “噫! 言游過矣! 君子之道, 孰先傳焉? 孰後倦焉? 譬諸草木, 區以別矣. 君子之道, 焉可誣也? 有始有卒者, 其唯聖人乎!”
자하문지 왈 희 언유과의 군자지도 숙선전언 숙후권언 비제초목 구이별의 군자지도 언가무야 유시유졸자 기유성인호
‘남방공자’인 자유와 ‘서하공자’ 자하가 맞대결을 펼칩니다. 공자가 자신의 제자들 중 문학에 있어 쌍두마차로 꼽은 사내들입니다. 남방 출신답게 영혼이 자유로운 자유가 먼저 선공을 취합니다. 자하가 어린 제자들에게 형식에 치중한 예의범절만 가르칠 뿐 군자학의 본질인 내면수양을 빠뜨리고 있다는 비판입니다. ‘외화내빈’은 다른 제자백가는 물론 유가 내에서도 맹자-순자로 이어지는 내성(內聖)파가 숭례(崇禮)파를 공격할 때도 단골 레퍼토리로 등장합니다.
그러자 자하가 강력한 반박을 가합니다. 사실 그 반박은 두 갈래로 해석돼 상당히 헷갈립니다. 어떤 이들은 군자지도는 소학(일상의 예의범절)과 대학(수제와 치평)을 병행하는 것인데 어찌 소학을 가르친 것만 침소봉대해 대학의 가르침이 없다고 하느냐는 논리를 전개합니다. 다른 이들은 작은 것부터 배우고 큰 것을 터득해나가는 단계적 수행이 있는 법인데 어찌 바로 큰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험담을 할 수 있느냐는 논리를 전개합니다.
자하가 논리력과 비유법이 남다른 사람이란 점을 염두에 두고 해석하면 후자가 적절해보입니다. 어린 제자들에게 본질적인 것 안 가르치고 자질구레한 것만 가르친다는 비판에 대한 논리적 대응으로 “모든 건 때가 있는 법”이란 게 더 적절하기 때문입니다. 병행론을 주장하려면 어린제자들에게 내면수양도 가르친다는 내용이 등장해야하는데 그게 보이지 않습니다. 혼돈을 가져온 것은 초목의 비유 때문입니다. 초목을 키울 때 종자마다 키우는 법이 다 다르다고 해석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봤을 땐 처음엔 풀이었다가 커서 나무로 자라는 식물을 콕 찍어서 말하면서 단계별 교육을 강조한 것으로 봐야합니다. 따라서 마지막의 ‘유시유졸(有始有卒)’을 ‘시종여일(始終如一)’로 새길 수 있게 됩니다.
‘순자’ 비십이자편에선 자유학파와 자하학파에 대한 비판이 함께 등장합니다. 자하학파에 대해선 몸가짐과 옷차림이 단정하고 기품 있지만 마음씀씀이가 쌀쌀맞다 꼬집습니다. 자유학파에 대해선 먹고 마시고 즐길 줄은 알지만 게으르고 무능하다고 후려칩니다. 북방의 공자학단이 좀 더 엄격하되 인간미가 떨어지는 각박한 위군자(僞君子)를 많이 배출했다면 남방의 공자학단은 느슨하되 게으르고 무능한 위군자를 양산한 부작용이 있었던 듯합니다.
이 장의 대결 승자는 얼핏 자유가 아니라 자하로 비칩니다. 자하의 답을 어떤 방식으로 새기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하의 손을 들어주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럴까요?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나이가 어리다고 생활습관만 가르치고 왜 그래야 하는지를 가르치지 않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권위주의적 발상입니다. 군자지도가 높고도 어려워서 나중에 가르쳐야한다는 것이야말로 공자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주장입니다. 배우는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군자지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물 뿌리고 빗자루질하는 쇄소(灑掃), 손님을 공손히 접대하는 응대(應對), 어른 앞에서 어떻게 나가고 물러서야하는지에 대한 진퇴(進退)에도 그 형식만 가르칠게 아니라 왜 그래야하는지를 납득시켜야합니다.
따라서 자유의 비판은 정곡을 찌른 것이요 자하는 교묘한 말솜씨로 논점을 이탈하고 허수아비 공격을 가한 것입니다. 그런 저에서 무고를 했다 비판받아야할 사람은 자유가 아니라 자하입니다. 진정한 공자의 제자라면 엄격한 자하의 실(實)뿐 아니라 느슨한 자유의 허(虛)를 함께 취할 줄 알아야합니다. 그것이 ‘비판적 논어읽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