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편 자장(子張) 제11장
자하가 말했다. "큰 덕은 문지방을 넘지 않으나 작은 덕은 그것을 넘나들 수 있다."
子夏曰: "大德不踰閑, 小德出入可也."
자하왈 대덕불유한 소덕출입가야
원문의 한(閑)은 문지방을 뜻합니다. 유(踰)는 넘는다는 뜻입니다. 대덕과 소덕은 그와 관련해 대비적으로 그려집니다. 대덕은 넘지 않아야 하고 소덕은 넘어도 되는 문지방이라, 과연 그게 뭘까요?
이를 이해하려면 먼저 대덕과 소덕의 차이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주희는 이를 대절(大節)과 소절(小節)로 풀었습니다. 큰 절개와 작은 절개라? 큰 절개는 국가공동체와 관련한 절개요, 소절은 개인 간의 절개를 뜻합니다. 예를 들어 충성을 바치는 대상을 함부로 바꾸지 않는 것이 대절이고, 사랑이나 우정의 대상을 바꾸는 것을 소절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그에 따르면 대절은 결코 꺾어선 안 되는 것이고 소절은 꺾인다고 과히 탓할 바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덕(德)과 절(節)은 다릅니다. 덕은 인간이 그것을 갖췄을 때 사람들이 좋아하고 따르게 되는 좋은 품성입니다. 절은 자신의 믿는 바(신념)나 뜻한 바(지조)를 꺾지 않고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덕은 적극적 베풂에서 빛나고 절은 소극적 지킴에서 빛납니다. 따라서 덕을 절로 바꿔 이해하는 것은 이해의 지평을 스스로 좁히는 것이 되고 맙니다.
공자는 덕을 언급한 적은 있지만 대덕과 소덕이란 표현을 쓴 적은 없습니다. 그에겐 군자와 소인의 구별만 있었습니다. 왜 대인과 소인이 아니라 군자와 소인일까요? ‘논어’에서 대인은 대부(大夫)를 뜻했습니다. 나랏일을 다루는 높은 관직의 인물입니다. 그럼 군자는 대인과 어떻게 다를까요?
군자는 본디 통치하는 사람, 즉 군왕(君王)을 뜻했습니다. 계급적 관점에서 보면 대인 보다 더 높은 존재입니다. 상고시대나 고대에 군자는 혈통으로 결정됐습니다. 공자는 이런 고정관념에 과감히 도전했습니다. 타고나야 군자가 되는 게 아니라 인격 도야(수제)를 통해 덕을 갖추고, 지도력 함양(치평)을 통해 도를 터득하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고 주창했습니다.
공자의 최대 화두는 수제(덕)와 치평(도)을 하나로 엮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그 둘을 천의무봉으로 엮어낸 전범이 되는 인물이 성인(聖人)입니다. 요순우와 탕왕 문왕 무왕 주공처럼 전번이 되는 인물입니다. 모두 과거의 인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서’ 그 둘의 접목을 꿈꾸는 이는 어떻게 불러야 할까요? 바로 군자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군자가 가능태(뒤나미스)라면 성인은 현실태(에네르게이아)에 해당합니다. 마찬가지로 대인 중에 군자가 있을 수 있지만 군자가 꼭 대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인의 위치에 있지만 덕을 갖추지 못하고 도를 깨치지 못했다면 그는 군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인물은 대인의 지위에 있더라도 소인과 다를 바가 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이를 통해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란 뜻의 소인의 개념 역시 군자를 지향하지 않는 사람이란 뜻으로 의미가 확장된 것입니다.
공자의 이런 사상 궤적을 좇다가 우리는 덕의 개념을 이해하게 됩니다. 군자의 인격적 품성이 바로 덕입니다. 그런데 자하는 그것을 둘로 나눠 대덕과 소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자처럼 대덕을 국가공동체와 관련한 덕으로 풀어버리면 도(道)와 다를 바가 없는 범주의 오류가 발생합니다. ‘대덕=도, 소덕=덕’이 되어버리는 겁니다.
이는 공자의 가르침을 정밀하게 읽어내지 못한 해석입니다. 수제의 관점에서 덕을 이해하면 사람됨의 크기를 말합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사이즈입니다. 자기와 식솔밖에 생각 못 하는 나르시시스트가 소인이라면 덕을 갖춘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한 연민과 배려가 큰 사람인 겁니다. 하지만 같은 덕이라도 나와 가까운 친지와 이웃만 생각한다면 소덕이요 공동체 전체를 생각하면 대덕이라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게 자하가 문학의 귀재라는 점입니다. 덕이 넘나드는 문지방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걸 넘어서는 덕의 크기에 주목하게 만드는 역설적 표현을 쓴 겁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사이즈가 엄청나게 큰 사람은 그 한계가 없는 것과 같아집니다. 그러니 넘어설 문지방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그런 이해와 배려의 사이즈가 작은 사람은 한계가 있기에 그 한계를 넘나들게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대덕불유한(大德不踰閑)’은 ‘대도무문(大道無門)’과 상통하고 ‘소덕출입가(小德出入可)’는 '소도유문(小道有門)'에 해당한다고 봐야 합니다.
앞서 제12장에서 자하가 자신의 어린 제자들에게 쇄소(灑掃), 응대(應對), 진퇴(進退)부터 가르친 것도 이와 연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린 제자들은 소덕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처음엔 그 한계를 지어주되 그것을 넘나들면서 그 한계를 조금씩 확장해 나가야 한다는 논리가 도출됩니다. 쇄소, 응대, 진퇴는 모두 문지방 안에서 이뤄지되 그 문지방을 살짝 넘나드는 것도 필요한 자기수양의 일환입니다. 그 한계를 들고나는 법부터 익히되 언젠가 그 문지방 자체가 필요 없는 경지를 지향하라. 이것이야말로 자하가 말하고 함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