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름보다 어짊이 더 중한 이유

12편 안연(晏然) 제17장

by 펭소아

계강자가 공자에게 정치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정치란 바르게 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솔선해 바르게 한다면 누가 감히 부정을 저지르겠습니까?”


季康子問政於孔子. 孔子對曰: “政者正也. 子帥以正, 孰敢不正?”

계강자문정어공자 공자대왈 정자정야 자솔이정 숙감부정



여러 차례 언급했던 정자정야(政者正也)의 테마가 등장하는 장입니다. 맹자와 주자는 이를 도덕과 정치를 합일시키려는 도덕정치의 메시지로 받아들였습니다. 정치를 도덕의 최대화로 바라본 것입니다. 공자도 같은 생각일까요? 저는 반드시 그렇다고 보지 않습니다.


공자의 군자학은 덕(德)과 도(道)로 구성되며 그 둘을 하나로 묶어주는 개념이 인(仁)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덕이 윤리를 관장한다면 도는 정치를 관장합니다. 인은 그 둘의 합일을 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둘의 원만한 결합을 중재하고 절충하는 개념에 가깝습니다.


맹자는 인을 덕의 하위 개념으로 봤습니다. 그래서 공자의 군자학이 도와 덕, 정치와 윤리의 합일을 도모했다고 해석했습니다. 주자는 도를 이(理)와 기(氣)로 분해해 설명하고 덕을 다시 사단칠정(四端七情)으로 세분화했지만 도와 덕의 합일을 추구한 도덕정치론이란 점에선 맹자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공자는 어짊을 촉매로 삼아 정치의 영역에서 빛과 소금이 될 정도의 윤리적 씨앗을 뿌리고자 했습니다. 헌데 맹자와 주자는 그런 촉매도 없이 바로 윤리의 토대 위에 정치의 탑을 쌓으려 한 것입니다. 공자가 인을 교집합 삼아 도와 덕의 최대공약수를 찾고자 했다면 맹자와 주자는 인이란 교집합도 없이 도와 덕의 최소공배수를 끌어내려했다고나 할까요?


‘바르게 하다’에는 만물이 정도를 걷게 한다는 뜻도 있지만 비뚤어진 것을 바로 새운다는 뜻도 있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정자정야에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뜻이 더 강하다고 풀어낼 필요가 있습니다. 시대정신에 부응하는 문제에 집중해 그 왜곡된 것을 바로 잡는데 집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모든 정치적 사안에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는 도덕정치의 최대화를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정치는 필요합니다. 하지만 도덕이 정치를 삼키는 식이 되어선 안 됩니다. 정치가 제대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 빛과 소금이 되는 선에서 도덕의 역할은 제한되어야 합니다. 공자가 말한 ‘어진 정치’와 중용이 필요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도(정치)와 덕(윤리)의 최적의 균형점을 최선을 다해 찾아내고 유지하는 것. 21세기에도 어짊과 중용의 가치가 필요한 이유를 저는 여기서 찾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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