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편 안연(晏然) 제10장
자장이 어떻게 해야 덕을 높이고 미혹에 빠지지 않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공자가 말했다. “진실함과 미더움을 으뜸으로 삼고, 의로움을 실천하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이다. 그를 사랑하면 살기를 바라고, 그를 미워하면 죽기를 바라나니 언제는 살기를 바라다가 또다시 죽기를 바라는 것이 미혹이다. 진실로 넉넉해지기 위함이 아니라 그저 기이한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子張問崇德辨惑.
자장문숭덕변혹
子曰: “主忠信, 徙義, 崇德也. 愛之欲其生, 惡之欲其死, 旣欲其生, 又欲其死, 是惑也. 誠不以富, 亦祗以異.”
자왈 주충신 사의 숭덕야 애지욕기생 오지욕기사 기욕기생 우욕기사 시혹야 성불이부 역지이이
치평파인 자장이 이번엔 도가 아니라 덕에 대해 묻습니다. 헌데 공자의 답이 도가 실행되는 것에 물었던 15편 ‘위령공’ 제6장의 답과 비슷합니다. 위령공 편 제6장에선 ‘언충신, 행독경(言忠信, 行篤敬)’이 강조됐습니다. 충실하고 믿음직스러운 말과 도탑고 정중한 행동으로 백성의 믿음부터 얻어야 도가 실행될 수 있다는 거였습니다. 이번엔 덕을 높이기 위해 ‘주충신, 사의(主忠信, 徙義)’하라고 합니다.
후대 유가에서 충(忠)은 나라에 대한 충성심으로 번역될 때가 많지만 공자가 말한 충은 진실한 마음으로 지극정성을 다한다는 뜻입니다. 요즘 표현으로 진정성과 상통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이번엔 주충신(主忠信)을 진실함(忠)과 미더움(信)을 으뜸(主)으로 삼으라고 새겨봤습니다.
사(徙)는 ‘옮기다’는 뜻과 특정 가치를 깃발처럼 들고 다니는 뜻에서 ‘신봉하다’와 ‘교화되다’는 뜻이 파생됐습니다. 따라서 사의(徙義)는 의로움을 깃발처럼 들고 다니며 실천한다는 뜻으로 새겨봤습니다. 그럼 공자는 위령공 편 제6장에서 강조했던 독경(篤敬)을 왜 여기선 의(義)로 대체했을까요?
자장이 도가 실행되게 하는 방법을 물었을 때 자장이 가장 부족하다고 여긴 덕목을 보완하라는 취지에서 독경(篤敬)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장은 낭중지추의 재주를 타고났는데 그에 대한 자부심이 남달랐습니다. 그것이 자칫 오만으로 비출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되풀이해 겸손하고 성실한 자세를 강조했습니다. 자장은 그런 스승의 뜻을 잘 받들었습니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은 뒤 자장이 ‘言忠信 行篤敬’의 여섯 글
자를 허리띠에 써서 깊이 새겼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독경은 인의예지(仁義禮智)의 덕목 중 예(禮)에 해당합니다. 반면 인의예지 중 자장 하면 떠오르는 덕목은 의(義)입니다. 자장은 공자 제자 중에 자로와 더불어 의를 가장 중시했습니다.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이득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한다(見危致命, 見得思義)’는 19편 ‘자장’ 제1장의 발언이 자장의 것임을 떠올리면 됩니다. 공문에서 파생된 여러 학파 중에서 자장학파는 의협심을 강조하는 협유(俠儒)의 길을 개척했습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 과정에서 자장학파가 치명타를 입은 이유도 견위치명의 학맥 때문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따라서 자장이 덕에 대해 물었을 때 공자가 의로움을 강조한 것은 그런 자장의 덕목을 높이 평가하면서 그 성취를 독려한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의로움의 깃발을 높이 들고 그를 실천에 옮기는 것이 덕을 높이는 것이라는 스승의 말을 들었을 때 ‘아, 스승님이 나를 알아봐 주시는구나’고 발그스레 얼굴이 달아오르는 자장을 떠올리는 것이야말로 ‘논어’에 대한 드라마틱 독해 아니면 뭐겠습니까?
이 장의 마지막 문장인 ‘성부이부, 역지이이(誠不以富, 亦祗以異)는 ’시경‘에 수록된 ‘아행기야(我行其野)’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 것입니다(원문에선 誠이 成으로 표기됨). ‘아행기야’는 바람난 남편과 절연하고 본가로 돌아가는 아낙네의 상심이 담긴 작품입니다. 시집왔을 때 들뜬 마음으로 지나온 들판을 되짚어가면서 남편을 원망하는 내용입니다. 그 마지막 구절은 남편이 바람난 이유가 ‘치부를 위해 돈 많은 여인과 바람난 것이 아니라 단지 색다른 여인과 놀아나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고 꼬집은 것입니다.
덕이라는 고귀한 주제를 다루는 데 이런 사랑노래 구절이 들어가는 것이 어색하다고 느낀 송대 유학자 정이와 주자는 이 구절이 16편 계씨 제12장 마지막 문장 전에 들어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했습니다. 그에 대해선 앞서 이미 살펴봤듯이 불필요한 데다 고전의 원문을 자신들 입맛에 맞게 뜯어 맞추는 것이라 적절하지도 않습니다.
그럼 공자는 왜 ‘아행기아’의 마지막 시 구절을 여기에 덧붙인 것일까요? 한때 사랑을 고백했던 남편이 바람을 피우게 되는 것, 그게 미혹되는 게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사랑할 때와 미워할 때 사람의 마음이 180도 바뀌는 것을 이야기하며 당시 유행가 가사를 끌고 온 것입니다. 이때 사람의 마음을 미혹하는 것은 이익이 아니라 색다르고 기이한 것을 좇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자장이 말한 견득사의(見得思義)의 표현에는 의로움의 대척점에 경제적 이득을 취하려는 마음이 있다고 가정합니다. 공자는 그것만으론 미혹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경제적 이득 때문이 아니라 호기심 때문에 바람을 피우듯 색다르고 기이한 것을 탐하는 마음으로 인해 미혹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정자와 주자 같은 송유들은 도덕군자를 지향하며 “사랑 같은 건 난 몰라”를 견지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공자가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뜻을 포착하는데 실패했습니다. 그럼 “사랑 없인 난 못 살아”를 외치는 현대인들은 왜 이를 간파하지 못하는 걸까요? 새로운 것, 색다른 것이 상품이 되는 자본주의적 삶의 노예가 된 지 오래이기 때문 아닐까요? 그런 점에서 자본주의는 자장이 경계한 득(得)과 공자가 경계한 이(異)가 하나로 합쳐져 한번 빠지면 혼자 힘으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미혹의 모래늪(quicksand)'이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 마음의 소리까지 읽어내는 거대 모래벌레까지 득실거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