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편 안연(晏然) 제9장
노애공이 유약에게 물었다. “올해에는 기근이 들어 재정이 부족한데 어찌하면 좋겠소?”
유약이 답했다 “10분의 1만 거두시지요?”
노애공 말했다 “10분의 2를 거둬도 내 오히려 부족한데 어찌 10분의 1만 거둘 수 있겠소?”
유약이 답했다. “백성이 풍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부족하다 할까요? 백성이 부족한데 임금이 누구와 더불어 풍족하다 할까요?”
哀公問於有若曰: “年饑,用不足,如之何?”
애공문어유약왈 연기 용부족 여지하
有若對曰:“盍徹乎?”
유약대왈 합철호
曰:“二,吾猶不足,如之何其徹也?”
왈 이 오유부족 여지하기철야
對曰:“百姓足,君孰與不足?百姓不足,君孰與足?”
대왈 백성족 군숙여부족 백성부족 군숙여족
공자와 가장 닮았다 하여 한때 그 후계자로 꼽혔던 유약(有若)이 등장합니다. 노나라 사람으로 성은 유(有), 이름은 약(若), 자는 자유(子有)로 염구와 같았습니다. 그래서 ‘논어’는 염구에 대해선 성을 붙여 염유로 칭하고 유약은 본명을 표기해 구별했습니다. 사마천의 ‘중니제자열전’에선 공자보다 43살 어리다 했고 ‘공자 가어’에서는 33살 어리다고 돼 있습니다. 33세 연하면 안연, 자공, 원헌 등과 동년배로 제(弟) 계열 제자에 가깝고 43세 연하면 자유, 자하, 자여(증자), 자장과 동년배로 자(子) 계열 제자에 가깝습니다.
유약은 72현에는 들었지만 공문십철에는 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당나라 현종 때 곡부에 있는 공묘(公廟)에 공문십철 10명의 좌상을 배향할 때는 제외됐습니다. 대신 그 고향땅의 지명을 따서 변백(汴伯)'이라는 시호를 받았습니다. 그러다 송나라 3대 황제 진종 때 ‘평음후(平阴侯)'로 시호가 한 단계 더 높아졌습니다. 이후 주희에 의해 안연, 자여(증자), 자사, 맹자를 ‘4자(四子)’라 하여 공자 위패 바로 아래 배향하면서 안연 대신해 자장이 들어가 새로 십철이 됩니다. 그러다 청나라 건륭제 때 유약과 주희를 더해 공문십이철로 공묘에 들어가게 됩니다.
공자 사후 유약이 공자를 대신해 공문을 이끌었다는 기록은 여러 곳에서 보인다는 점에서 사실인 듯합니다. 하지만 그 기간은 길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중니제자열전’과 ‘예기’에는 공자의 역할을 대신하기에 유약이 역부족이어서 물러났다는 일화 2가지가 전해집니다. 그 하나는 공자는 밤하늘의 천문을 읽고 큰 비가 올 것을 맞췄는데 유약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공자로부터 ‘주역’의 도를 전수받은 상구(商舊)가 마흔이 넘어 뒤늦게 아들 다섯을 둘 것이라는 공자의 예언이 들어맞았으나 유약은 그러지 못했다는 겁니다. 합리적 인문학자였던 공자가 그런 식으로 신기 어린 점술을 펼쳤을 리 만무합니다. 아마도 유약의 학문이 공자에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 와전돼 전해진 것 아닐까 합니다.
‘맹자(孟子)’의 등문공(滕文公) 상(上) 편에 실린 에피소드는 좀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공자가 서거하고 3년 상을 마친 제자들이 스승을 그리워하다 못해 공자와 닮은 유약을 공자 자리에 앉혀놓고 스승 대접을 하는 것에 자하, 자유, 자장이 동의했으나 자여만이 “스승을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며 이를 거부했다는 것입니다.
이를 보면 공자 사후 공문의 4대 문파를 형성하게 된 자하, 자유, 자장, 자여 간의 라이벌 의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자하는 북방 진(晉)나라 출신, 자유는 남방 오나라 출신, 자장은 북방과 남방 사이에 위치한 진(陳)나라 출신입니다. 반면 자여는 유약은 같은 노나라 출신이었습니다. 이를 감안하면 비(非)노나라 출신인 자하와 자유, 자장이 연합해 유약의 위상을 높이려 한 것이 노나라 출신으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자여를 견제하기 위함이란 해석이 가능합니다.
실제 ‘논어’를 보면 공자에 버금가는 존칭으로서 자(子)를 붙여준 공자 제자가 4명 등장합니다. 14개장에서 줄기차게 증자(曾子)로 등장하는 자여, 3개장에서 유자(有子)로 불린 유약, 2개장에서 염자(冉子)로 불린 염유, 1개장에서 민자(閔子)로 불린 민자건입니다. 4명의 공통점은 모두 공자와 같은 노나라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이중 염유는 대부의 반열에 올랐기에 그에 대한 존칭으로서 자(子)를 붙여준 것으로 보입니다. 민자건은 공문의 원로인데다 자여 학파가 중시한 효의 화신과 같은 인물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특별우대 차원에서 붙여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반면 증자와 유자의 겨우는 ‘논어’ 편집 당시 두 사람의 제자가 많아서라는 추론이 유력합니다. 이 경우 증자라는 호칭이 유자라는 호칭을 압도한다는 점에서 자여의 영향력이 가장 컸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유약은 ‘논어’에 모두 4개장에서 등장합니다. 유자로 등장하는 3개장은 모두 1편 ‘학이’에 몰려있고 이 장이 유약이란 이름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장입니다. 그 상대가 노애공입니다. 공자가 죽었을 때 그를 “니부(尼父)”라 부르며 “내가 모범으로 삼을 사람이 없어졌다”고 절절한 애도를 표한 노나라 제후입니다. 아마도 공자 사후 유약이 공문의 얼굴마담이 되자 노애공이 초빙해 국사에 대한 조언을 구할 때 오고 간 발언이었을 가능성이 커 보입니다.
핵심은 흉년이 들어 세수가 줄어든 것에 대한 대책을 묻는 내용입니다. ‘맹자’ 등문공 상편에는 하은주 3대의 조세제도가 소개돼 있습니다. 하나라는 공(貢)법, 은나라는 조(助)법, 주나라는 철(澈)법이라 불렀는데 해당 경작지 면적은 다르지만 똑같이 그 소출의 10분의 1만을 세금으로 거둬갔다는 내용입니다. 공법은 작황과 무관하게 평년 기준으로 10분의 1에 해당하는 곡식을 거둬가는 정량제여서 혹독했던 반면 조법과 철법은 작황과 연동된 정률제라는 점에서 합리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그렇지만 주나라의 철법은 춘추시대로 접어들면서 그 세율이 10분의 2 이상으로 늘어났습니다.
흉년이 들어 재정상황이 어렵다는 노애공의 고민을 들은 유약은 주나라의 철법으로 돌아갈 것을 제안합니다. 곤궁해진 백성의 형편을 돌보면서 공자가 찬양한 주나라 제도로 돌아간다는 명분을 함께 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노애공의 답은 “10분의 2를 거둬도 턱없이 부족하니 불가능하다”입니다. 이를 들은 유약의 답은 공자의 자리를 대신하기에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임금 개인의 곳간만 생각하지 말고 백성 전체의 살림살이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등문공에 대한 맹자의 조언 역시 같습니다. “임금을 백성의 부모라 하는데 흉년이 들어 자식들이 굶어 죽을 위기에 처했을 때 부모의 마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유약의 말을 이에 비견하면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자식이 배부른 모습을 보면 부모는 굶어도 배부르게 느껴지고, 자식이 굶주린다면 자신의 눈앞에 먹을 게 많아도 수저를 들 수 없는 게 부모의 마음 아니던가요?”